마이바흐

<<미얀마>>

kongbak 2006. 7. 31. 22:12

<<미얀마>>


공식국가명 "미얀마연방(Union of Myanmar)"로 인도차이나반도의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불교국가인 미얀마는 동쪽으로 라오스와 태국, 남쪽으로 벵갈만, 안다만해과 접하고 있다. 국토면적이 한반도의 약 3.5배에 달하며, 삼림면적이 전국토의 57%에 달하는 약390,000㎢으로 티크목재와 광물등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다.

☞수도 : 양곤(Yangon, 약 538만명 2001년 기준)
☞인구 : 약 5,240만명(2003년 기준)
☞면적 : 678,528㎢(한반도의 3.5배)
☞민족 : 버마족(70%), 카렌족(7%), 카친족(2%) 등
☞언어 : 미얀마어(공용어), 영어, 힌두어, 광동어
☞종교 : 불교(89.5%), 정령숭배(1.5%), 회교(4%), 힌두교(1% 미만), 기독교(5%)
☞주요도시 : 만다레이(Mandalay), 몰멩(Moulmein), 바쎈(Bassein),페구(Pegu)

☞행정구분 : 총 14개 주로 구성된 연방형태
   7개의 자치주(State): 소수종족이 거주
   7개의 행정주(Division) : 다수종족인 미얀마족이 거주

☞언어
미얀마어가 공식공용어로, 대도시에서는 영어가 가능하고, 중국, 태국 등 국경접경지역에서는 중국어와 태국어가 가능하다.

☞기후
열대성 몬순기후로 연평균기온이 27.4℃이며, 연평균 강우량은 2,812㎜이다. 5월하순부터 10월말까지 이어지는 우기때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2월말부터 5월 중순까지 여름이고, 겨울은 11월초부터 시작하여 2월 중순까지 이른다. 미얀마의 겨울날씨는 한국의 가을날씨와 유사하다.


☞시차
한국시각과 비교하여 2시간 30분이 늦다.


☞역사

미얀마지역에서의 인류문명의 흔적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몇세기전부터 중앙아시아로부터 내려온 '몬족'이 딴륀(Thanlwin)과 씻또웅(Sittoung)강변에 생활의 터를 잡았다. 그들은 몬-크메르계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지금의 미얀마에 거주한 최초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몬족은 이곳을 "황금의 땅"으로 칭하여, 불교와 인도의 아쇼카왕과의 무역을 시작하였다.

오랜기간동안 미얀마에는 몬족만이 살았던 것은 아니다. 몇세기가 지나, 티벳에서 온 퓨(Pyu)족은 바마르족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풍요로운 이라와디강변을 따라 정착했던 바마르족(Bamar)의 지배를 강화시키면서 파간일대의 지배권 바마르족이 가지게 된다. 바마르족으로부터 버마왕국의 기원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아나와라타(Anawrata)왕 은 몬의 수도인 타톤(Thaton)을 정복하고, 3만명의 죄수를 파간으로 쫏아내는 역사적인 일을 감행하게 된다. 바마르의 아나와라타(Anawrata)왕은 몬족의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근간이 되었던 불교에 귀의하고 몬족어를 수용하는 등 다양하게 몬족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온순한 민족이 아닌 몬족은 훗날 반란을 꾀하여 아난와라타왕의 아들을 죽이게 된다. 몬족의 반란을 평정한 키안지타(Kyanzitta)은 지배권을 갖게 된다.

키안지타(Kyanzitta)의 출현은 미얀마 역사에 있어 황금시대의 서막을 예고한다. 이라와디강변에서 농작물을 경작함으로써, 이라와디강 주변에 새로운 문명의 태동을 가능케 하였다. 그는 이곳에 수천개의 사원을 만들고,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게 된다. 왕조은 1세기정도 이곳을 지배한 후,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였던 칸이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망하게 된다. 1287년 보찬(Vochan)전쟁의 폐전으로 왕권자체가 몽골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쪽으로 쫓겨난 몬족과 바마르족은 다시 바고(Bago)에 터를 잡고, 도시를 건설하게 하였다. 북쪽에서는 타이족의 후예인 "샨(Shan)"이 인화(Innwa)왕조를 세운다. 곧이어 벌어진 몬족과 샨족간의 전쟁은 유럽인들의 아시아 이동과 시기를 같이 하게 됨으로써, 인도차이나반도의 유럽인의 식민지정책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미얀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유럽인, 베네치아의 '니코토 디 콘티(Nicoto di Conti)'는 1435년 바고에 들어와 4개월간 머물게 된다. 1498년 포르투칼의 '바스코 디 가마(Portugeuse Vasco de Gama)'는 인도에서 해상로를 개척함으로써, 아시아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윽고, 포르투칼은 동양의 무역 교두보로 사용하기 위해 인도의 고아(Goa)를 정복하였다. 이후 포르투칼의 '안토니 코리(Anthony Correa)'는 1519년 마타반(Martaban)의 총독과 미얀마에서 최초 무역 협정을 맺는다. 총독의 왕인 타빈쉬웨티(Tabinshweti)은 그의 동의 없이 이뤄진 협정에 인정하지 않았다. 1541년 타빈쉬웨티은 마타반을 공격하게 되고, 포프투칼인은 또다른 정복지인 라카인(Rahkin)로 퇴각하여 '미옹후앙(Myohuang)'과 연합하게 된다.

1600년, 포르투칼의 '필립 드 브리토 이 니코트(Philip de Brito y Nicote)'가 미얀마를 찾게 되는데, 이는 미얀마역사상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 드 브리토는 바고를 정복하여 라카인왕으로 등극하고, 도시의 요새 건설를 시작한다. 드 브리토는 곧 고아로 가서 부왕의 딸과 정략결혼한 후, 군대와 무기를 가지고 바고로 되돌아 왔다. 결혼 선물로 받은 미얀마에서 그는 자신을 왕으로 군립하였고 불교 사원을 파괴한다. 드 브리토의 통치는 13년간 이어지다, 몰락하게 되었으나, 영국인을 중심으로 한 유럽인인은 미얀마에 계속 머무렀다.

17세기중엽까지 미얀마는 프랑스와 독일,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다. 바마르의 아라웅파야왕은 라칸을 정복하고 벵갈국경지역, 인도부근 영국령 라진(Rajin)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1819년 영국이 버마를 침공하여, 라칸, 타닌타이(Tanintharyi), 아쌈(Assam), 마니푸르(Manipur)등지를 빼았고, 1852년 버마남부까지 확대해 갔다. 급기야 1886년에는 인도국경지역까지 이르는 미얀마 전국토를 점령하게 되었다.

아시아의 독립운동의 시작은 영국 점령군의 퇴각할때 미얀마에 자치권을 인정하면서부터 기인된다. 사야 산(Saya San)이 이끄는 버마군은 영국군을 공격하게 되고, 이는 영국군으로하여금 버마를 독립된 식민지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후, 학생지도자,'타킨 아웅산(Thakin Aung San)'이 독립을 외치는 시위를 주동한다. 산은 그의 독립 시위로 인해 결국 체포되었지만, 중국으로 도망 가 일본인과 공조하여 독립을 향한 노력을 하게 된다. 일본인으로부터 미얀마의 독립을 약속받고, 영국을 몰아내는 데에 적극 지원 받은 산은 1941년 뜻을 이루게 된다. 수천명의 목숨을 잃은 영국군은 퇴각을 선언하게 되고, 4년이 지난후에야 일본과 산의 동맹군은 결국 버마를 되돌려 받게 되었다. 결국 1947년 영국은 국지전에 대한 부담감으로 버마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한 아웅산은 사실상 실권을 쥐지 못한채, 그 해에 암살당하게 된다. 그의 동료인 탄킨 누(Thankin Nu)이 그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58년, 시민소요가 터지자, 탄킨누는 네윈(NE Win)에게 소요진압을 지원해주기를 요청한다. 결국 누는 1960년 몬족과 라카인족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된다. 누의 자치권인정이 제대로 이행되지않자, 1962년 샨과 카인족은 폭동을 일으켜 새로운 세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당시 요청이 없었지만, 급진 공산주의자였던 네윈 장군은 폭동을 진압하고, 또한 누를 체포 감금한 후, 군부정치를 선언하게 된다.

1966년 풀려난 누는 지방으로 숨어들어가, 폭동세력 조직하여, 1971년 폭동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진압되고 만다. 네윈의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린 1981년, 누는 석방되어 고향을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 1988년 타트마도(Tatmadaw)의 탄압에 대항한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결국 타트마도는 그 이듬해 민주선거에 동의하게 된다. 선거에서 민족 민주연합(NLD)가 60%를 얻게 되었으나, 타트마도는 새로운 지도자의 동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선거무효를 선언한다.
군사정권의 폭정하에 비폭력 투쟁을 전개한 민주운동의 지도자였던,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 아웅산의 딸)는 자택에 감금당한 1991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여받았다. 오늘날에도 수지의 평화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양곤>

양곤은 미얀마의 수도이자 아름다운 호수와 수목 공원이 있는 잘 어우러진 도시이다. 면적 199km2, 인구 336만명(1993)으로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랑군(Rangoon)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본 도시명은 양곤이다. 1755년 미얀마의 알라웅파아(Alaungpaya)왕이 몬족의 다곤 마을을 정복하고 그곳을 전쟁의 끝이라는 뜻의 양곤으로 개명하며 미얀마의 수도로 지정하였다.

이 도시의 상징은 매년 수만명의 순례자들이 다녀가는 쉐다곤 파고다이다. 이 탑의 역사는 2,5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부처의 8가닥 머리카락을 모셔두기 위해 건립했다.

현재 저렴한 노동력으로 많은 기업들이 현지에 공장을 세우며 투자를 하고 있으며, 특히 양곤은 많은 다국적 기업들과 해외 공관이 있다. 그러나 아직 폐쇄적인 정책으로 인해 양곤을 제외하고는 편의시설을 찾아 볼수가 없다.

(출처 : '미얀마' -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