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윤여동설 - 금나라의 상경회령부는 내몽골 만주리 부근
윤여동설 - 금나라의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는 내몽골 만주리(滿洲里) 부근 - 최초주장
금태조 아골타 초상
고려사절요 예종 10년(A.D.1115) 조를 보면,
“생여진의 완안아골타가 황제라 칭하고 이름을 민이라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거주하며 문자가 없어 끈을 매어 약속한다. 그 지방에 돼지, 양, 소, 말이 많은데, 말은 준마가 많다.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며 어릴 때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기 때문에 장성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을 달리고 전투를 익혀 강병이 되는데, 여러 부락이 제각각 우두머리라 하여 통일이 되지 못하였다.
그 지방이 서쪽은 바로 거란이요, 남쪽은 바로 우리나라(고려) 땅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조정을 섬겼는데, 조회하러 올 때마다 부스러기금, 담비가죽과 말을 폐백으로 삼았으며, 우리 조정에서도 은과 폐백을 후히 주어 해마다 그렇게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나라(고려) 평주의 중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나라의 시조라 한다” 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으로 여진에 들어가서 아지고촌에 살면서 여진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라 하며, 고을이 활라태사를 낳고, 활라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를 핵리발, 막내아들을 영가라 하였는데, 영가가 제일 영걸스러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이 지위를 계승하고, 오아속이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금나라의 건국과 그 왕실의 혈통을 대강은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금나라 왕실의 선조가 고려에서 여진으로 이주해 간 고려사람 금준 또는 극수라는 것이다.
또한 금사 태조본기에도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로서 고려로부터 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함보가 금태조 아골타의 7대조로 기록되어 있다.
★ 송나라의 홍호가 지은 송막기문에는 금왕의 9대조가 감복(龕福)이라 기록되어 있고 신라인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금왕(金王)이란 아골타의 손자인 3대 희종을 말하는 듯하다.
금나라의 국호를 왜 하필 “금(金)”이라고 했느냐 하는 것에 대한 추정들이 많지만 만주원류고에는 금나라의 국호는 신라왕의 성을 따라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태조 아골타의 원래 성씨가 김(金)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함보는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서 성이 김(金)씨였는데, 신라 말기 혼란할 때에 신라를 떠나 여진으로 들어가 살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 김함보가 신라 어느 왕의 후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 김씨 왕족 진골귀족이었던 것은 확실할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금 “금(金)”이라 부르고 있는 국호는 “김(金)”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금나라가 아니라 “김나라”라고...............
★ 금나라 왕실이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후예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금나라의 건국시조인 아골타가 김함보(김감복)의 7대손이라는 기록이 있고, 금나라가 건국된 때가 1115년이므로 이때로부터 약 210년쯤 전에 김함보가 신라를 떠나 여진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김함보는 신라 말기인 서기 900년경에 혼란스런 신라를 떠났을 것인데, 서기 900년은 신라 52대 효공왕 4년에 해당되는 해로서, 이때는 신라가 매우 어지러워 견훤이 후백제를,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게 되어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때였다.
따라서 함보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기록한 금사의 기록보다 감복이 신라인라고 한 송막기문의 기록이 매우 정확하다고 할 수 있고, 또 이때는 신라가 멸망한 935년 이전이므로 김함보가 곧 마의태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금나라(1115-1234)는 여진족(시기에 따라 숙신, 읍루, 물길, 말갈이라고도 불렀다)이 중심부족으로서 1115년에 건국되어 1125년에는 산서성 북부와 그 북쪽 내몽골에 위치했던 요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며, 1126년에는 송나라의 도읍 개봉을 공격하여 빼앗고, 송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게 되어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 금나라는 그 후 상경회령부, 북경대정부, 중도대흥부, 동경요양부, 서경대동부, 남경개봉부를 설치하게 되는데, 남경개봉부와 서경대동부를 제외하고는 아직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그리하여 송나라에서는 휘종과 흠종의 송환을 협상하기 위해 홍호를 사신으로 파견하게 되는데, 금나라에서는 홍호를 억류해 냉산(冷山)으로 유배를 보내게 되어 홍호는 그곳에서 10여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돌아와 유배생활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송막기문(松漠記聞)이다.
송막에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송막기문을 보면 홍호는 자신이 유배생활을 했던 냉산이 연산(燕山)에서 3천리 떨어진 곳이고, 금나라의 도읍(상경회령부)에서 2백리 떨어진 불모지였으며, 냉산의 동남쪽 1천리에 장백산이 있으며, 장백산에서 흑수가 발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금나라가 건국된 상경회령부는 지금의 어디일까?
연산산맥은 지금도 북경 북쪽을 가로질러 산해관까지 이어지고 있는 산맥인데, 냉산은 바로 이 연산산맥에서 3천리 떨어졌다는 것이고, 지금 중국은 장백산을 백두산 부근으로 보고 금나라의 상경회령부를 흑룡강성 합이빈(하얼빈) 아성(阿城)이라고 하고 있으나, 옛 기록 속의 장백산은 지금의 대흥안령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흑수(흑룡강)는 대흥안령 아이산 부근에서 발원하는데, 냉산의 동남쪽 1천여리에 장백산이 위치한다고 했으니 결국 냉산은 대흥안령의 서북쪽에 위치했다는 말이 되고, 따라서 금나라의 상경회령부 역시 대흥안령의 서북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 지역을 비정해 보면 지금의 “내몽골 호륜호(呼倫湖)” 부근이 된다.
금나라는 내몽골 호륜호(후룬호) 만주리 부근에서 일어나 금나라를 세우고, 서쪽으로 요나라를 쳐 멸망시키고, 다시 송나라의 도읍 개봉을 쳐 빼앗아 대제국이 되었던 것이고, 당시 지금의 북경 동쪽 난하 부근에는 우리의 고려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사에 금나라의 남쪽에 고려가 위치했고, 금나라의 서쪽에 요나라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던 것이다.
따라서 금나라의 상경회령부는 만주리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하얼빈의 아성이 금나라의 상경회령부가 아닌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은 지금 압록강 북쪽을 만주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후대에 이르러 붙여진 것일 뿐이고, 옛 만주는 대흥안령 서북쪽 만주리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