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바흐
강화도, 통일의 땅 미래의 땅
kongbak
2008. 12. 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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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기사전송 2008-12-1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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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산따라 강따라<2> 강화도② 강화가 키운 것은 왕골과 인삼뿐이 아니다. 강화의 배꼽은 걸출한 인물을 낳았다.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고려 무신정권의 1인자 최우, 그리고 비운의 왕 고려 고종이다. 고려산에서 태어난 연개소문은 당(唐)을 대파한 천하맹장으로 고구려 최고의 권력을 자기 가문에 집중시키는 바람에 그가 죽은 뒤 고구려도 멸망일로를 걷게 된다. 고려의 최씨 무인정권 역시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다. 아버지 최충헌의 권력을 물려받은 최우는 몽골이 침략하자 수도를 강화로 옮겨 고려산에 고려궁을 짓는다. 강화 고려궁의 뒷산인 북산을 개경처럼 ‘송악산’이라 개명하고 궁궐의 배치도 개경과 똑같이 했다. 아들 최항, 손자 최의까지 항몽 의지를 꺾지 않다가 최의가 살해되자 무인정권 60년도 막을 내리고 이듬해 원(元)나라와 화친함으로써 고려는 굴욕적인 원의 섭정기로 접어들고 만다. 46년 재위 기간 동안 최씨 정권의 꼭두각시였던 고려 고종은 아이러니하게도 원과 화친을 시도하자마자 생을 마감한다. 고종의 능 앞에 선 나그네는 왕 노릇도 못하고 동가숙 서가식하다 간 그의 처연한 기운에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다. 휑하게 남은 고려궁터를 걷고 있노라니 바람결에 최우 영가와 고종 영가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최우 영가는 “내가 고려다. 내가 살아있는 한 고려는 건재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고종 영가는 “강화도는 감옥이었다. 나는 강화에서 단 한 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왕의 탄생과 죽음 함께한 섬 나그네는 연산군의 유배지이자 철종이 잠시 머물렀던 잠저소가 있는 교동도로 가기 위해서 창후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燕山君)과 25대 왕 철종. 같은 왕이었지만 둘의 운명은 천지차이였다. 연산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와 죽었으며, 떠꺼머리 농사꾼이었던 철종은 졸지에 택군(擇君)되어 한양으로 떠난다. 도대체 강화의 무엇이, 왕을 만들기도, 또 왕을 죽이기도 하는 걸까. 교동도 월선리 선착장에 내리자 왕족 영가들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전남 해남 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政爭)에서 밀려난 선비들은 멀리 보내면 그만이었지만 왕족은 달랐다. 한양과 가까운 곳에 격리시켜 그들의 동태를 항상 면밀히 살펴야만 했고, 그러기에 교동도는 최적의 유배지였던 셈이다.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 왕 희종(熙宗)부터 조선시대 영창대군(永昌大君), 임해군(臨海君), 능창대군(綾昌大君) 등 11명의 왕족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며 특히 연산군은 유배온 지 두 달 만에 죽어 이곳에 가묘를 썼고, 그의 아들과 부인도 이곳에서 명을 다했다. “연산군 유배지는 말이 많습니다. ‘연산군 적거지’ 표지석이 있는 읍내리와 신곡동 신골, 그리고 영산골 등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인데요.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동행한 지인은 내 얼굴만 바라봤다. 영능력자로서 후보지 1순위를 정해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가만히 연산군 영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뒤 지체 없이 읍내리로 향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 성곽의 흔적만 찾아볼 수 있는 교동읍성을 지나 연산군 유배지에 도착하자 가슴이 턱 막혔다. 늙은 오동나무가 드리운 옛 우물터 한 편에 ‘연산군 적거지’라는 초라한 표지석과 함께 녹슨 안내판이 서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연산군과 폐비 신씨를 모신 사당인 ‘부근당’이 보였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왕의 유배지치고는 너무도 초라했다. 사당에 향을 사르자 연산군 영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억울함을 호소했다. “내가 정말 나쁜 왕이었다면 나를 폐위시킨 그들이 명나라에 거짓을 고하지 않았을 거요. 나는 두 여자(폐비 윤씨와 인수대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밖에 없소.” 알려진 것처럼 색만 밝히는 패륜왕도 아니었다며 자신의 후궁은 오직 한 명뿐이었고, 애첩이자 요부로 알려진 장녹수(張綠水)도 빈도, 귀인도 아닌 겨우 정3품 소용(昭容)에 불과한 후궁으로, 그녀보다 왕비인 신씨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었다고 고백했다. 연산군 유배지로 알려졌던 신곡동 신골로 향했다. ‘신씨’가 많이 살아 ‘신골’로 불렸다는 이곳은 연산군이 아닌, 연산군의 아들 폐세자 황과 그의 부인이 최후를 맞은 비극의 장소였다. 폐세자 황은 유배지를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었고, 이를 지켜본 부인은 충격으로 목을 매고 말았다. 현재 그곳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들의 비통한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강화 인물들은 하나같이 강화 조수의 차이처럼 극생극멸했다. 나그네는 강화도와 동검도 사이를 시원하게 달리고 있었다. 별안간 자줏빛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아닌가. 장관이었다. 알아보니 자주색 꽃이 피는 칠면초라는 식물이 갯벌을 초원삼아 번성하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검은 자줏빛처럼 강화는 여전히 신비를 숨기고 있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 갑비고차란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가 되며, 두 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이라는 뜻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유입된다. 옛날엔 이 물을 모든 강의 할아비가 된다는 뜻으로 조강(祖江)으로 불렀다. 할아비강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한 줄기는 짠물(염하)로 흘러나가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흘러들어 예성강을 품는다. 아마도 이 큰 두 줄기의 하천을 보고 두 갈래 물인 갑곶이라고 했을지 모른다. ◇한강·예성강·임진강이 이룬 삼합수 그러나 강화 바다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 세 개의 강이 만나는 엄연히 삼합수(三合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동시에 강이 세 개가 만나는 삼합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세계 최대급의 조수간만의 차가 삼합수에 맥동치니 강화는 한반도, 나아가 지구의 배꼽된 것이다. 뛰어난 영적 능력의 소유자였던 단군(檀君)은 이런 엄청난 지기(地氣)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이야말로 국기(國基)를 세우고 백성과 더불어 수만 년을 살아도 될 땅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 아들(부루 夫婁·부소 夫蘇·부우 夫虞)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여 삼랑성(三朗城)의 전설을 낳게 했다. 나라의 첫째 조건은 역시 튼튼한 국방에 있다. 역사적으로 강화도는 우리나라 국방의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랑성 안에는 군창(軍倉)뿐 아니라 조선실록을 보관했던 장사각(藏史閣) 등을 둬 유사시에 국가적 보루로서 몫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꼽았던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강화도는 분단 이후 남북대치 상황에서 최전방인 동시에 수도 서울을 지키는 최후의 요새가 되는 지역이 아닌가. 육지와 연결되어 극생(極生)의 기운이 가득 한 강화는 지금 제2의 개국을 준비하고 있다. 강화는 남으로 영종도를 북으로 개성을 거느리며 트라이앵글을 형성하고 있다. 영종도에는 세계 각국의 항공기가 드나드는 거대한 비행장이 마련돼 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올림픽국제공항의 거대한 십자 주차장보다 훨씬 규모가 큰 영종도 비행장은 지금보다 세 배를 더 넓힐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자가용 비행기 시대 개인 전용기 격납고가 있어 아시아 물류허브를 넘어 첨단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지구촌 정거장의 기반시설을 완비하고 있다. 남북 경협의 핵심 사업이 개성공단에 위치한다. 최근 들어 삐걱거리고 있지만 대륙에선 최초 흑인대통령이 당선되어 오랫동안 정체된 한반도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강화의 지하에는 삼합수가 실어 나르고 태평양의 거대한 조수가 빚어 낸 퇴적광물이 지하에서 숨을 쉬고 있다. 이 광물은 미래의 인류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의 광물이다. 인삼이 고려와 조선의 국부가 되었듯 이 천혜의 광물은 다가오는 제2의 개국에 밑천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강화에서 멀리 개성 쪽을 바라보았다. 나그네의 눈에 앞으로 4년 뒤, 그러니까 2013년의 광경이 펼쳐졌다. 개성은 서울 못지않은 행정의 요지로 건설의 망치 소리가 한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