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특별기획]시베리아 대륙 동토의 문명들

kongbak 2008. 1. 15. 13:45

[특별기획]시베리아 대륙 동토의 문명들
신석기시대부터 뛰어난 문화 태생… 청동기문명 한반도·만주 등에 파급  -   2007 11/27   뉴스메이커 751호

레나 강 살류 카축 지역의 쉬시킨스키 암각화.

시베리아는 동쪽의 야블로노브이 산맥과 스타노브이 산맥에서 서쪽의 우랄 산맥까지다. 시베리아에는 3개의 큰 강이 흐른다. 모두 사얀-알타이 산맥과 같은 남쪽의 큰 산맥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른다. 레나 강, 예니세이 강, 그리고 오비 강이 그것이다.

시베리아는 추운 곳이다. 겨울에는 정말 춥다. 1월 평균 온도가 남시베리아는 -16℃, 야쿠치아는 -48℃다. 그러나 여름에는 따뜻하다. 봄이면 땅속은 얼어 있어도, 땅 위는 새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여름이면 사람들이 수영복을 입고 일광욕도 한다.

예니세이 중·상류 선사문화 발달

북방유라시아 문화 유적 분포

한반도는 시베리아와 많이 떨어져 있고 기후도 판이하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시베리아가 우리와 많은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해왔다. 왜 그럴까.

시베리아의 남쪽 지대는 유목 문화권에 속했다. 예를 들면, 기원전 7~3세기의 선(先)흉노-스키타이 시대에 알타이 지역에는 파지릭 문화가,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에는 타가르 문화가 각각 분포했다. 이 두 문화에는 소위 스키타이 3요소라는 모든 문화 요소를 다 갖추고 있어, 흑해 북안 우크라이나 지역의 본원적인 스키타이 문화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선흉노-스키타이 세계에는 동쪽의 오르도스 지역 모경구 문화도 포함되고, 그 문화 요소들은 중국 하북성 북부 지방에까지 확인된다. 고조선은 이곳에서 유목민들과 국경을 접했을 것이니 그 문화 요소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에 널리 보이는 아키나크 모양의 마제석검은 바로 유목민의 문화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시베리아와 관련이 있다고 할 때는 사실 그 넓은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말하는지 파악하기가 힘든 때가 있다. 시베리아는 넓고, 지역마다 문화가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에는 바이칼 유역의 세로보 문화를, 청동기시대에는 예니세이 강 상류지역의 카라수크 문화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초기 철기시대에는 타가르 문화나 파지릭 문화를 거론하기도 한다. 우리가 스키타이 문화라고 한 것은 사실 헤로도투스가 말한 흑해 북안의 그 스키타이가 아니라 스키타이 문화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사카 문화, 알타이의 파지릭 문화, 그리고 예니세이 강 유역의 타가르 문화였으며, 가깝게는 오로도스 지역의 모경구 문화였다.

시베리아에서는 예니세이 중·상류 지역이 가장 발달된 면모의 선사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미누신스크 분지가 있다. 구석기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화가 발달했다.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는 타스민 문화, 아파나시예보 문화, 오쿠네보 문화, 안드로노보 문화, 카라수크 문화, 타가르 문화가 일부 공존하기도 하면서 차례로 등장했다.

시베리아의 구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예니세이 강과 레나 강 상류 사이에 자리 잡은 말타 유적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매머드의 상아로 만든 여인상과 새(鳥)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시베리아에는 또한 암각화 유적이 수없이 분포한다. 예니세이 강 유역에는 바야르 암각화와 쉬쉬카 암각화가 있다. 특히 바야르 암각화에는 소도 그려져 있고, 천막도 그려져 있고, 또 솥도 그려져 있다. 구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의 그림이 있다. 암각화는 레나 강 유역에도 많다. 카축 암각화와 나린얄가 암각화가 바로 그것이다. 모두 강변을 따라 나 있으며, 암벽에 동물을 새기기도 하고 그리기도 했다.

시베리아 청동기문화 몽골서도 확인

'말타의 비너스',안드로노보 문화 토기, 아파나시예보 문화 토기(오른쪽부터 시계방향).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의 신석기시대 후기 타스민 문화에는 사람의 형상을 새긴 선돌과 계란 모양의 돌이 있다. 이 선돌에는 사람의 얼굴만 새긴 것도 있지만 몸의 일부를 함께 새긴 것도 적지 않다. 둥근 눈이 2개 혹은 3개가 표현되어 있다. 머리 위로 광선이 뻗어나가기도 하고, 쇠뿔이 솟아나 있기도 하다. 머리 위에 배가 표현된 경우도 있다. 이 인면(人面)은 마스크-가면을 표현했을 것인데, 때로는 우주인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인면과 함께 동심원과 사각형이 합쳐진 듯한 기하문양도 있다. 하나의 선돌에 인면 3개가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어, 천계와 지계, 그리고 하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면 석상의 주변에서 말 뼈와 새 뼈 등이 발굴됐다. 모닥불 흔적도 있는데, 불과 연기, 증기를 통해 신과 영령들에게 음식을 대접한 유적으로 해석된다.

시베리아의 청동기 문화를 연 것은 기원전 3000년 중엽~2000년 초의 아파나시예보 문화다. 이 문화는 미누신스크 분지를 중심으로 하지만 관련 유적들이 동쪽으로 몽골에서까지 확인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주변 타이가와 삼림초원지대에서는 아직 석기시대가 계속되고 있었다. 아파나시예보 문화인들은 청동으로 칼, 송곳, 장신구 등을 만들어 사용했고, 금과 은도 알고 있었다. 토기는 바닥이 둥글거나 뾰족한 것이 많았으며, 향로도 만들어 썼다. 무덤은 토광에 적석을 하고 둘레에는 호석을 두른 것이었다. 신석기시대 타스민 문화인들이 남긴 석상에 황소를 새기기도 했다. 이들은 사냥과 어로 이외에 소와 양, 말을 사육했다. 목축에 종사한 것이었다. 예니세이 강 중·상류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그 유물이 청동기시대 초기의 일반적인 양상이므로, 자생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이는 사얀-알타이 지역에 천연 동광석이 풍부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베리아 지역은 이후 오쿠네보 문화 단계를 거쳐 안드로노보 문화와 카라수크 문화로 넘어간다. 안드로노보 문화는 그 중심 지역이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이기 때문에 시베리아와는 약간 무관한 느낌을 주기도 하나, 예니세이 강 유역도 이 문화권에 포함됐다. 안도로노보 문화 자체는 기원전 17세기에 시작됐지만, 예니세이 강 유역의 안드로노보 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14~12세기로 편년된다. 안드로노보 문화는 번개무늬 토기가 가장 큰 특징이다. 지금으로부터 6000~7000년 전의 아무르 강 유역 토기와 신석기시대 후기 연해주와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 토기에도 그와 꼭 같은 번개무늬가 새겨져 있다. 아랄 해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신석기-청동기시대에 동일한 문양 모티브를 사용한 것이다.

기원전 14/13~8세기의 카라수크 문화는 광대한 시베리아는 물론이고, 서쪽으로 멀리 우크라이나 지역까지, 남서쪽으로 카자흐스탄 지역까지, 동쪽으로는 중국 북방 지역과 동북3성, 한반도 그리고 연해주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똑같은 청동손칼 한반도에서도 출토

나린얄가 암각화를 조사하는 탐사단.

이 문화의 석관묘는 한반도 청동기시대 석관묘의 기원으로 오래전부터 논의됐다. 청동 단검과 손칼, 멍에 모양의 청동기, 물갈퀴 모양과 연주형의 청동 장신구, 동포 등 수많은 청동기가 제작 사용됐다. 그중에서 산양과 사슴뿔 모양의 손잡이 끝 부분 장식이 있는 단검과 손칼은 몽골과 중국 북방 지역, 그리고 심지어는 은허에서조차 발견됐다. 방울 모양의 손잡이 장식이 있는 단검은 중국 북방 지역에 널리 확인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둥근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손칼이 우리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평북 용천 신암리 유적에서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유역의 것과 꼭 같은 청동 손칼이 출토되었다. 비파형동검보다 더 이른 시기의 청동 유물로서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청동 유물 중의 하나다. 카라수크의 손칼은 연해주에도 보인다. 이 시기 북방유라시아 대륙은 그야말로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카라수크 문화라는 강풍이 휩쓸고 있었고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연해주와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는 그 시작이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유역의 카라수크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연해주와 한반도의 이른 시기 청동유물은 많은 부분 카라수크 문화와 공통성을 띤다. 앞의 청동 손칼이 그러하고, 청동기시대 전기의 검신이 세장한 삼각형 모양인 마제석검이 그러하다.

시베리아의 바람은 이후 초기 철기시대인 선흉노-스키타이 세계에서 더욱 세차게 불었다. 남시베리아 지역에서 발생한 ‘스키타이’ 동물 양식과 같은 문화 요소들이 서쪽로는 카르파트 산맥에까지 이르고, 동쪽으로는 하북성 북부지역까지 도달하여 북방유라시아 대륙을 소위 ‘스키타이 문화’로 뒤덮었다. 나는 기원전 7~3세기의 이 문화권을 모두 통칭하여 ‘선흉노-스키타이 세계’라고 부른다. 이 시기 고조선은 카라수크 문화에 뒤이어 바로 선흉노-스키타이 세계와 인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 고조선을 대표로 하는 ‘환(環)만주문화권’은 비파형 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단검 문화를 창조했지만, 역시 서쪽의 유목민 문화 요소를 전혀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베리아는 동서 길이가 약 7000㎞, 남북 길이가 약 3500㎞, 면적이 약 1000만㎢로 정말로 엄청난 크기다. 크기만큼 시공에 따른 문화 양상 또한 지극히 다양했다. 신석기시대부터 뛰어난 문화를 태생시킨 시베리아 대륙은 계속해서 새로운 문명을 태동했으며, 그 영향은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는 북방유라시아 대륙을 모두 포괄할 정도였다. 한반도와 만주지역 그리고 연해주도 그 시베리아의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고고학> <후원 : 대순진리회>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6084&pdate=뉴스메이커-751

 

 

웅녀와 호녀의 ‘사랑싸움’ 이야기 [특별기획] - 2007 12/25   뉴스메이커 755호

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  툰드라 지역 순록치기 곰 토템족의 사냥꾼 범토템족 정복사

단군신화도 순록유목 태반사의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 훌룬부이르 대초원의 양 유목. <김문석 기자>
코리안 루트 탐사에서 단(檀)족 군장들인 단군의 족적을 추적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걸림돌이 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한반도 사관에 고착된 우리의 시각과 시야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으니 단군도 한반도에서 경영형 부농으로 입신한 인물쯤으로 상정하고 한민족의 창세기를 서술해내는 이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군이 기원전 2000~ 3000년 전에도 고온다습한 태평양 중 한반도에서만 농사를 지어먹고 산 청동기인이라고 못박아놓아야 주체적이라며 안심하는 경향은 여전한 것 같다.

5000~60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은 많게든 적게든 움직이게 마련이다. 생업이 유목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튀어나온 광대뼈며 째진 눈과 염소 수염, 그리고 성형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콧날이 거의 서지 않았던 많은 납작코 유형은 오랜 툰드라 생활사를 겪지 않고는 한반도나 발해 연안에서만 설계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신체 유형을 디자인해준 툰드라와 삼림 툰드라 태반사를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

신석기시대 이래 순록치기 천하
시베리아 전도. 순록 유목 문화권인 오비·예니세이·레나 강은 북극해로 흐르고, 몽골고원에서 발원한 케룰렌강은 아무르 강과 연결돼 태평양으로 흐른다.
물이 북극해로 흘러드는, 만주의 북쪽에 있는 사하의 툰드라와 삼림 툰드라는 물이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대만주 권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활하고, 순록의 먹이인 이끼(蘚)가 눈처럼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래서 놀랍게도 다른 식량 생산업과는 달리 본격적인 유목의 태초라 할 특수 목축인 순록 유목이 극북지역에서 대규모로 먼저 이루어졌다. 그곳은 너무 추워서 호랑이도 양도 거북이도 못 산다. 숫수달인 ‘부이르(Buir)’-예(濊)도 산달인 ‘너구리’-맥(貊)도 못 사는 그 동토지대에서 순록치기의 천하가 이미 신석기시대 이래로 경영돼왔다는 사실은 지금의 한반도 한국인이 보기에는 참으로 기상천외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예니세이 강의 ‘예니세이’는 원주민의 이름이다. 레나 강의 ‘레나’는 원주민어로 ‘큰 물’이라는 뜻이며 대만주권과 대사하권을 남북으로 가르는 장대한 스타노보이 산맥에서 아무르 강으로 흘러든 제야 강의 ‘제야’는 에벵키어로 ‘칼날’이라는 뜻이다. ‘아무르’는 에벵키 청년의 이름이다. 이를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흥안령에서 흐르는 눈 강과 백두산에서 기원하는 송화 강이 칭기즈칸이 마시고 자란 케룰렌 강을 발원지로 하는 아무르 강으로 유입해 마침내 한반도의 동해-태평양으로 흘러든다는 지리적 초보 지식을 익힌 이는 또 얼마나 될까. 케룰렌 강에서 종이배를 띄우면 한국의 동남해안 삼척이나 부산에도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2005년에 사하를 답사해 관계 정보들을 수집하고 나서는, 2006년 여름엔 마침내 툰드라~수림 툰드라 지역인 한디가 압기다 에벤족 순록 유목지를 답사하며 아주 놀라운 체험을 했다. 7월 11일에 연해주에서 출발해 스타노보이 산록을 돌아 바이칼 호수에 오는 동안 그간의 북극권 답사 기억들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정리해 이야기들을 나눠보았지만, 코리안루트 탐사대원들과 함께는 그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바이칼호 알혼섬의 부르칸 바위에 코리족 족조 탄생 설화가 서려 있는 것은, 순록이라는 뜻인 ‘코리(槁離)’의 유라시아 최대 유목지대가 앙가라 강을 통해 예니세이 강으로 이어지는 지대와 전에는 물길이 열려 있는 흔적이 보이는 카축 일대를 통해 레나 강으로 이어지는 지대 사이의 북극해권이기 때문이다. 고원 건조지대 바이칼 호수면에 비친 따가운 햇볕이 반사돼 천상의 구름을 소멸시키기 때문에 거대한 호수지대이면서도 건조하고 하늘이 유난히 맑아 이곳에 제천단이 많이 세워지고 천문 관측이 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어느 천문기상학자의 견해가 새삼 생각난다.

수분 친화적 토템족 정착 성공
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의 전설이 서린 바이칼호 알혼 섬의 부르한 바위. <김문석 기자>
IT, BT 시대에 ‘단군고기(檀君古記)’는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세계 각지의 관계 정보를 충분히 소화하는 터전 위에 과학 언어로 그 순록 유목 태반사를 본격적으로 복원하는 차원에서 해독해야 한다. 어느 시대, 어떤 생태에서 뭘 해 먹고 살아왔느냐에 관한 엄밀한 논증 과정을 거쳐 논리 정연하게 사람 생명 살이 얘기로 다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그 ‘게놈’에 주목하며 조선 태반사를 복원해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랄 산맥 중에 대통령이 집정하고 쿠마(錦: 熊) 강이 흐르는 ‘고미’ 공화국-곰 나라-이 있다. 요즈음도 일부 투르크계 종족이 살고 있지만 고대에는 주로 황인종이 원주민으로 살았는데 그 신화 내용이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기록된 것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박물관에는 아예 아기를 안은 청동 곰녀상까지 진열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민족 동류 루트 답사를 이끌고 있는 김영우 교수의 조언이다.

박정학 치우학회장은 환인에 대해 황의돈·송석하 소장본 ‘삼국유사’ 및 1902년 도쿄대 발행 활자본 등에는 분명히 모두 ‘환국(桓國)’으로 쓰여 있는데 1921년 교토대학의 영인본에만 ‘환인(桓因)’으로 되어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환웅은 환인의 아들이 아니라 북방 몽골로이드의 호칭 관행을 따라 환국(Khan ulus)의 서자라는 관직을 가진 칸(桓: Khan) 바아타르(雄: Baatar)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같은 동굴에 사는 웅녀와 호녀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함은, 식량 생산 기원지인 서아시아에서 알타이 산을 넘어 사얀 산맥을 타고 동래한 선진 환웅족이 곰 토템족과 범 토템족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이 식량 생산 단계로 진입하려는 경쟁을 벌였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이들이 식량 채집자 사냥꾼만으로가 아니라 좀 더 편안하게 사람답게 사는 식량 생산자 순록치기가 되는 길을 모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실은 전래하는 단군의 영정대로라면 그 긴 수염은 혹한지대인 극북의 몽골로이드의 것일 수 없고 따라서 그 혈통에는 당시의 선진 서아시아인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동굴 근거지 쟁탈전서 곰토템족 승리
다마스커스 박물관의 아기를 안은 곰녀상.
마늘과 쑥을 먹고 햇빛을 안 보고 100일간 견디기를, 사냥꾼의 식량 채집 단계에서 순록치기의 식량 생산 단계로 나아가는 시련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려본 것으로 풀이해볼 수는 없을까. 물고기도 잡아먹는 수분 친연적인 곰 토템족이 이와 유사한 북극 생태 환경에 익숙한 순록을 유목 가축화하는 데 성공한 반면 북극의 혹한 생태 속에서 못 견디고 덜 수분 친연적인 범 토템족이 이에 적응해내지 못하는 과정을 설화로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기서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나라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곧 그 생업을 지칭해 ‘순록치기의 나라’라고 했음을 말해준다.

실은 웅녀 전설도 2000년대 지식 산업 시대에는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레나 강 북극해권에는 호랑이는 추워서 못 살고 곰은 잘 사는데 특수 목축인 유목의 경우에 순한 순록의 유목이 먼저 시작되고, 아무르 강 태평양권 몽골 스텝에서는 북극권에서 역시 추워서 못 사는 양의 유목이 사나운 말을 타고나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다. 말은 금속 재갈을 물려야 탈 수 있으므로 청동기~철기시대 이후에나 그것이 가능했다. 레나 강 북극해 권에서 유목 생산을 먼저 시작한 곰 토템족은 힘이 넘쳐 아무르 강 태평양 권으로 진출하게 됐는데, 여기서 호랑이 토템 부족과 대흥안령 북부 선비족의 갈선동이나 고구려 집안(輯安)의 국동대혈(國東大穴)과 같은 동굴 근거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연히 선진 곰 토템족이 범 토템족을 내쫓고 동굴을 독점해 살면서 환국의 서자 벼슬아치인 환웅과 결혼해 곰녀의 자손들을 낳게 됐는데, 그게 칸의 혈통을 타고난 알탄우룩(Altan urug: 黃金氏族=‘해’겨레)-천손족인 순록치기 한(韓: Khan) 민족일 수 있다.

사람이 다른 짐승과 달리 사람으로 다시 나게 된 것은 당연히 생명 생산과 사육의 원리를 터득해 식량 채집 단계에서 식량 생산 단계라는 생명 주관 과학 누리로 진입하면서다. 그래서 엔 베 아바예프 투바대학 교수는 “순록을 상징하는 젖을 주는 암사슴(Sugan-Soyon, 鮮)이라는 낱말에서 ‘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본다. 웅녀는 환웅과 결혼해 사람 곧 ‘순록치기’-선인(鮮人)을 낳았던 터다”라고 말한다.

나는 일찍이 현지 답사 중에 이런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파이호(巴爾虎)로 음역되는 바르쿠족은 호랑이 토템일 가능성이 있다. ‘바르(Bar)’가 몽골어로 범-호랑이인데 ‘쿠’는 ‘~을 가진’이란 뜻이므로 그런 가능성이 높다. 한자 음역에 ‘호(虎)’자가 든 것도 음역(音譯)과 의역(意譯)을 동시에 추구하기를 좋아하는 한인(漢人)들의 음사(音寫) 전통으로 보아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예컨대 코카콜라를 가구가락(可口可樂)으로 음역하고 고려를 멋진 2개의 뿔이 달린 사슴이란 고려(高麗)로 음역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실제로 바르쿠진 분지를 따라 내려오며 범내, 범바위, 범고개와 범골과 같은 호랑이 관계 지명이 많은데 바르쿠족 원주민들과 함께 하는 구체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번 답사 중에 7월 17일에 놀랍게도 셀렝게 강변 샤먼산 게세르 100년 기념비 앞에서 현지 원주민에게 1905년에 마지막 호랑이가 총살되었다는 정보를 확보해 마침내 이를 입증할 수 있었다. 금번 답사가 이룩한 작은 기념비적 업적이라 하겠다. 그 결과 이런 유목형 몽골의 여(女)단군-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 탄생 설화가 다시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비사’에 실린, 코릴라르타이(순록치기: Qorichi 부족들)의 메르겐(麻立干: Mergen)과 바르쿠진 고아가 결혼해 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를 낳는 이 탄생 설화는 실은, ‘코리(馴鹿)치’-순록치기가 돼 식량 생산 단계에 든 레나 강 북극해권의 선진 곰 토템족이 아직 식량 채집 단계에 머물러 있는 아무르 강 태평양권의 수렵민 후진 호랑이 토템족을 정복하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정녕 이 몽골 여시조 탄생 설화는 단군 탄생 설화의 유목형 전개라고 하겠다. <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몽골사><후원 : 대순진리회> 2007 12/25   뉴스메이커 755호
 
 
단군은 수달임금, 주몽은 산달 사냥꾼[특별기획] - 2007 12/18   뉴스메이커 754호
 
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  ‘獸祖’와 ‘유목’코드로 한민족 태반사 읽기… 조선·고구려는 순록유목 생태생업문화권 소산
중국 내몽골자치구 훌룬부이르시에 위치한 훌룬호. 훌룬-부이르 자매의 슬픈 전설을 담은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필자의 이번 역사 유적 답사길은 다른 대원들과 다른 구석이 있다. 특히 바이칼 호반과 훌룬부이르 몽골 초원 유목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미 1990년 초반부터 이제까지 십수 년을 오간 탐사 길이어서 그렇다. 어떤 부분은 초행길 독자들과 답사 현장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느낌마저 든다. 답사 일기를 되씹어가며 나름대로 재확인해 대원들과 더불어 정리하는 일이어서다. 역사를 쓰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여기저기 얽힌 절절한 추억들을 더듬어보는 계기도 되었다.
어쩌다 60대 중반을 넘긴 이 나이까지 사서 이 고생을 하고 다니나 하는 서러운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 길을 오가노라면 의사로, 또는 전기공학도로, 생명공학도나 철학도로 이 험한 역사 탐험길을 내닫는 엉뚱한 이들을 종종 만난다. 필자는 그래도 명색이 사학도라 그런대로 자기를 달랠 제 이야기를 나름대로 끄집어낼 수 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쩌다 순록한테 홀려, 어이타 수달이나 산달이라는 별명을 가진 너구리에게 이끌려 이 험로를 내가 이렇게 오래 헤매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문제를 잡으면 집요하게 놓지 못하는 고집스러움 때문일 뿐이었던가 보다.

‘너구리-맥’ ‘수달-예’라는 견해
훌룬호 남쪽 몽골공화국 접경지대에 있는 부이르호. 훌룬은 암수달, 부이르는 숫수달을 뜻한다. <김문석 기자>
코리안 루트 답사길에서는 7월 21일 부이르호반에서 부이르라는 남동생과 훌룬이라는 누이에 얽힌 전설을 현지 주민에게서 취재하면서 이야기가 비롯됐다. 훌룬호와 부이르호에 관한 이야기인데, 둘이 다 수달이지만 부이르는 숫수달이고 훌룬은 암수달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방은 서울의 어린이대공원 앞 세종대 역사학과 연구실이지만, 실은 이는 28년 만의 복귀일 뿐 나는 그간 20여 년을 춘천에 귀양살이하듯 해직당해 내려가 살다가, 동국여지승람에 ‘본래 맥국’이라는 기록이 있을 만큼 산달(山獺)인 맥(貊)-너구리를 비롯한 각종 짐승들이 많았던 왕년의 산짐승 천국에서 숨쉬고 살면서 산달인 맥의 나라와 그리고 이와 상대되는 동해변 강릉의 수달(水獺)인 예(濊)의 나라와 첫 인연을 맺었다.
조선과 고구려는 '뿔'을 상징으로 하는 순록과 '날개-깃털'을 상징으로 하는 새의 결합형 순록유목 생태생업 문화권의 소산이다. 대흥안령 지역 선비족이 사용했던 머리 장식. <김문석 기자>


전공이 몽골사인 데다가 마침 1990년대에 들어 북방 사회주의권이 개방되고 이어서 비행기가 오가고 인터넷망이 연결되면서 틈만 나면 수시로 지금까지 특히 바이칼-몽골-훌룬부이르 일대를 드나들거나 또는 한두 해 체류하며 더 머나먼 시베리아 귀양지에서 모든 잡념을 끊고 그 뿌리를 캐는 데만 전념하게 됐다. 1980년 해직교수의 색다른 기구한 인생유전이 맺어낸 결실이랄까. 나는 지금 다시 세종대 사학과에 복직해 정년 9개월을 남겨두고 이 글을 정리하고 있다.

시베리아-만주지대에서 고원지대를 대표하는 짐승이 산달인 너구리-‘맥’이라면 저습지대를 상징하는 짐승은 수달인 부이르-‘예’라는 것이 내몽골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아르다자브 교수의 견해다. 지금 부이르 호반에서 현지인에게 다시 확인하고 있지만 부이르는 전설상으로 숫수달의 뜻을 갖는 이름이다. 숫수달이 암수달보다 더 모피(Fur)가 좋아서 사냥감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Buir’의 ‘B’와 ‘R’자가 탈락하면서 ‘예(濊)’자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는 2003년 정월에 실제로 눈이 내리는 춘천 맥국 유허비 언저리를 현지 답사한 다음에 이런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예’계와 ‘맥’계는 역사적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왔다며 실례를 들어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예컨대 맥계인 거란(遼)이 서니 예계인 여진(金)이 일어나 이를 멸망시키고, 이 여진을 다시 맥계인 몽골(元)이 정복해 지배하다가 결국은 예계인 만주(淸)제국에게 아주 거의 철저히 멸망당했다는 것이지요. 저습지대 종족 예족과 고원지대 종족 맥계가 치열하게 공방사를 펼쳐온 오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변 강릉의 예국 유적과 산중의 짐승왕국 춘천의 맥국 유적이 상존한다는 시각의, 집요한 천착이 이제 아주 긴박하게 요청되고 있는 셈이지요. ‘예’라는 수달(水獺)과 ‘맥’이라는 산달(山獺)이 통일되면 ‘예맥’(濊貊)=달달(獺獺: Tatar)이 된다고 보는 이도 있어요.”

“단군조선의 단(檀)이 예맥국”
나는 이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달달=타타르는 단단(檀檀)으로 한문으로 음사(音寫)되기도 해서 실은 단군조선의 단(檀)이 수달과 산달, 곧 예와 맥이 통합된 예맥국일 수 있다고 봅니다. 문명화한 백(白)타타르가 ‘배달’로 불렸음직도 하지만, 선비족 단석괴(檀石槐)라는 칸도 있고 중국인명사전에는 단씨 성을 가진 인물이 십수 명이나 등재돼 있어요. 실은 동북아 고대사에 이름을 남긴 맥궁(貊弓)이나 단궁(檀弓)이 모두 맥족이나 단족이 만든 명궁이지, 근래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 해모수가 아들 주몽에게 ‘이는 박달나무로 만든 활인데…’ 하고 비장한 어조로 말하며 남겨주는 박달나무 활이 전혀 아니지요. 맥궁이 맥나무로 만든 활이 아니듯이 단궁 또한 결코 단나무로 만든 활이 아닙니다. 맥나무란 본래 없고 박달나무로 좋은 활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궁이나 맥궁이 실은 모두 예맥=달달=타타르=단단족이 만들어낸 명궁일 수 있다고 봅니다. 맥은 별명이 산달이니까요. 맥적은 물론 맥족이 만들어 먹던 적(炙)=불고기지요. 맥은 산달이라 시베리아 고원지대 타이가에서 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시달리다가 자연 발화로 만들어진 산짐승의 불고기에서 비롯한 듯하고요. 저습지대 예는 불씨가 구하기 힘들고 추워서 날고기를 주로 먹다 보니 육회나 물고기 회(膾)를 후세에 전해내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맥국 유적지가 있는 춘천의 불고기가 맛이 있고 예국 유적지가 있는 강릉의 회가 별미로 손꼽힙니다. 둘을 합하면 회자(膾炙)지요. 인구(人口)에 회자된다는 말이 있듯이 이는 동북아 고대의 별미 중의 별미인 특별 요리로 유명했지요. 본래 중국에서 비롯된 라면을 일본이 위생적으로 가공해 근래에 수출했고, 여기에 한국인의 맛내기 솜씨가 가미돼 한국 라면이 되었는데, 이 한국 라면이 베이징, 울란바토르, 시베리아와 모스크바는 물론 미국 식당가까지 들어가 라면 맛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역시 전통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고 실감하게 됐어요. 수달과 산달 사냥꾼들인 조선과 맥족 고구려가 창조해낸 맛의 천국인 셈이지요. 이런 맥락으로 미루어 저는 ‘단군(檀君)은 수달임금, 주몽(朱蒙)은 너구리 사냥꾼’이라고 강변하고 있지요!”

순록치기가 기마양치기로 발전
예맥족의 예는 숫수달(아래) <한국수달연구센터 한성용 소장 제공> 맥은 너구리에서 유래했다.<우르몽골훌룬부이르대학 황학문 교수 제공>
실은 나는 1999년 가을부터 대흥안령 북부 훌룬부이르 몽골 스텝에 한 해 동안 상주하며 이런 사실을 현지에서 직접 조사 연구해 국내에 보고했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 맥에 관한 이런 답사 보고가 주목받게 된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2005년 3월 23일에 서울대 수의과대학에 객원교수로 와 있는 흑룡강성 동물자원연구소의 박인주(朴仁珠) 조선족 교수가 “대·소흥안령에 별명이 산달(山獺)인 맥(貊)이라고 불리는 ‘너구리’-내몽골어 ‘엘벵쿠’가 지금도 적지 않이 뛰어 놀고 있다”고 관계 학회에 공식 보고를 하고 나서다. 그러나 그래도 언론은 꿈쩍도 않다가 2007년 봄에 내 책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에 이 내용이 등재되어 서울발 연합뉴스를 타고서야 다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현지 답사길 가기보다 더 어려운 험로였다.

마침 국내 유일의 수달 전문가인 한성용 교수를 소장으로 세계적인 차원의 ‘수달연구센터’가 춘천 언저리에 있는 화천에 세워졌는데, 이를 계기로 자잘한 밥그릇 겨루기식 연구를 지양하고 역사 정보가 전파를 타고 빛의 속도로 세계 각지를 오가는 IT지구 마을시대답게 과감히 시베리아-몽골에 그 문호를 열어 예맥의 맥=너구리 연구도 동물학적인 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베리아라는 세계 최대의 숲의 바다를 태반으로 그 창세기를 써온 종족들이 짐승을 조상으로 삼는 수조(獸祖)전설을 거의 100%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예(숫수달:Buir=夫餘)-맥(너구리:Elbenku)-조선(순록치기:Chaatang)-고[구]려(순록:Qori)-발해(渤海:늑대의 토템語: Booqai)-솔롱고스(黃 :누렁 족제비:Solongo의 복수형)라는 종족 또는 나라 이름이 이미 한민족 스키토·시베리안 기원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조선과 고구려-몽골 국명이 그러하듯이 이들은 순록치기가 훌룬부이르 몽골 스텝의 기마 양치기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기틀을 마련하는 것 같다.

조선과 고구려는 ‘뿔’을 상징으로 하는 순록과 ‘날개-깃털’을 상징으로 하는 새의 결합형 순록유목 생태생업문화권의 소산이다. 말은 그 이후의 후래적인 요소다. 그래서 스키타이인들은 뿔이 없는 말에게까지 황금 순록의 뿔 탈을 씌우려 한 것이다. 황소(뿔)와 백조(깃털)의 결혼 이야기로 내용이 구성된 순록치기 코리족 시조 탄생 설화가 이를 단도직입적으로 적시(摘示)하고 있다. 역사 드라마로 동북아가 온통 술렁이는 듯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한국과 중국의 그것들을 번갈아보면서 내가 아주 최근에 깨달은 사실이다.

툰드라, 타이가, 스텝과 농경지대를 두루 오갈 수 있는 힘센 동물이 각력(角力)을 자랑하는 황소였을 것이다. 순록치기 붉은 악마 치우(蚩尤)는 그걸 타고 툰드라-타이가-스텝-농경지대를 누볐으리라. 대규모 양치기 수단으로 철제 재갈을 말에게 물려 말을 타기 이전까지는 순록치기가 순록유목권을 벗어나면 힘센 황소를 주로 탔음은 물론이다. 한인(漢人)들의 그것과 다른 조선-고구려의 문무관복의 장식 치장들이 이를 잘 입증한다고 달리는 차 속에서 나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씨름도 뿔힘 겨루기인 각저(角抵)요, 우두(牛頭)머리도 ‘뿔의 칸’인 각간(角干)-이벌찬(伊伐:Eber飡)이다. 뿔 달린 도깨비의 요술도 여기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많다. 솟대는 새의 깃털로 상징된다. 기마 양유목의 모태인 순록유목태반에서 조선-고구려가 이미 배태됐다는 것이다. 그 호칭 자체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상상과 추리의 나래를 펼치는 나날들을 탐사길에서 보내면서 7월 말엔 어느새 답사의 종착역, 몽골 스텝의 바람이 거센 스텝인 대흥안령 남부 홍산 문화권에 들어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몽골사><후원 : 대순진리회>http://newsmaker.khan.co.kr/khnm.html?&start=12&pageok=1&code=116&pdate=
 
 
한국어의 유전자를 찾아서[특별기획] - 2007 12/11   뉴스메이커 753호

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 어웡크족·다구르족 언어에서 고대 한국어와 고구려 언어 흔적 발견
대흥안령 지역에는 어웡크족, 오룬춘족, 다구르족 등 여러 몽골로이드계 소수민족의 언어가 남아 있다.
우리는 흑룡강성과 대흥안령 지역의 여행을 계속했다. 2007년 7월 21일 우리는 하일라얼(Haila’er)에 있는 어웡크(鄂溫克, Owongku, 혹은 에웽키, 에벵키)족 박물관을 방문했으며, 나는 그 박물관의 젊은 여성 직원에게서 어웡크어로 숫자 1~10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런 연습을 하는 까닭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원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언어가 아직 살아 있는지 구어체 언어를 내 귀로 직접 듣기 위한 것이다. 그 젊은 어웡크 여성은 1~5까지 셀 줄 알았으며, 모르는 나머지는 휴대전화로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소수종족 언어와 문화 존폐 위기
다구르민족박문관에 전시된 사진(위)과 모리다와 시내에서 열린 다구르족 행사 강강수월래를 연상시킨다.
이틀 후인 23일 우리는 알리사(Alisa)에 있는 오룬춘(鄂倫春, Orunchun)족 박물관을 방문했다. 거기서 나는 한 젊은 여성 직원에게서 역시 오룬춘어 숫자 1~10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숫자 세기가 어렵자 자기 친구에게 달려가 조그만 오룬춘어 어휘 책자를 가져왔다. 그녀는 그 책자에 있는 숫자들을 그대로 읽었으며, 발음은 그 책자에 나와 있는 간단한 표기보다 훨씬 나았다. 분명 언어가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인 24일 우리는 다우얼(達斡爾, Dawoer, 혹은 다구르, 다후르) 민족 문화 공원과 박물관을 방문했다. 모리다와 다우얼 자치구(Molidawa Dawoer Autono-mous County)의 장이라는 한 노인이 나에게 다우얼어 숫자 1~10을 말해주었다. 그는 숫자 세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으며, 중간에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 10 이상의 숫자를 셌다.

현장에서 이런 자료들을 분석해보다가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즉 몽골어와 퉁구스어 양자의 원래 파열음 체제(plosive systems)에서 유성/무성 대응(the voiced/voiceless contrast)은 대체로 북부 중국어 파열음 체제의 대기음/비대기음 대응(the aspirated/non-aspirated contrast)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몽골어에서 d:t 대응을 가진 4 dorb: 5 tap가 다우얼어에서는 t:th 대응을 가진
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가 그 80대 노인이 말하는 언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지난 100년에 걸쳐 채집한 모든 언어학적 자료들은 비교 자료를 사용하기 전에 먼저 주의 깊게 다시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현대 중국은 다수 민족의 합중국
이제 에벵키족이나 다구르족 아이들이 자기들 언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외국 학자들이 쓴 책과 논문들을 찾아봐야 할 시점이 다가온 것 같다. 만일 이 민족 언어들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면, 민족 집단과 그 문화는 곧 사라질 것이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다구르족 노인 아르다합씨는 다구르어로 1~10까지 어렵지 않게 말했다.


이 언어들에는 먼 옛날 고대 한국어에서 차용해온 흔적과 고구려 제국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역시 모두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나는 26살 때 내가 자란 곳을 떠나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였다. 아프리카의 밤은 어두웠지만, 검은 아프리카인들은 어두운 밤보다 검었고, 오로지 눈의 흰자위와 웃을 때 보이는 이만 하얄 뿐이었다. 과거 500년 간의 아프리카 역사는 그보다 더 어두운 것으로 노예 무역과 식민 통치로 파괴됐다.

아프리카 민담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친절하게 대해도 불친절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대흥안령 지역 소수민족 박물관 또는 기념관의 동상들. 다구르족, 어웡크족, 오룬춘족 전사의 모습이다(위부터)
하지만 타인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을 즐거이 하면 되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들의 운명에 만족하며 살아온 아프리카인들은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과거 식민 지배를 한 서구제국 팀들을 격파했다. 한국인의 ‘할 수 있다’ 정신이 아프리카인들에게도 자신들의 과거 영광을 일깨울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제 그들의 신체적 역량은 스포츠와 같은 많은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500년 동안 아시아 역시 어두운 역사를 가졌지만, 아프리카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족감(自足感)과 타인에 대한 친절함은 아시아인에게로 유전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이래로 한국에는 조선이라는 하나의 왕조가 있어왔으며, 중국에는 명(明)과 청(淸)이라는 두 왕조가, 그리고 소아시아에는 투르크족의 오토만 제국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듣고 유럽의 지식 계층들은 놀라워 했다.

유럽인들이 침입해오기 전에 아프리카 역사는 밝고 평화로웠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기는 이집트 문명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했을 때 종말에 이르렀다. 이집트는 동방으로부터 힉소스(Hyksos)라고 불리는 기마민족의 침입을 받은 짧은 기간(BC 1670~1570) 외에는 거의 3000년 동안어두운 시기를 겪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 그리고 수메르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 집단이 셈어계(Semitic) 민족이었던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중국에서는 한민족(漢民族)과 알타이어계 민족 집단들이 거의 교대로(송, 원, 명, 청) 지배해왔다.

커다란 혼란기(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 하나로 통일된 평화로운 시대(진, 한)가 이어졌다. 알타이어계, 한족(漢族)계, 그리고 다른 계열 문화들이 하나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오고(5호16국), 그 혼란 속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그렇게 중국은 한족계(당, 송)나 아니면 알타이어계(요, 금, 원)에 의해서 다시 통합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EU가 유럽인 국가들의 연합인 것처럼, 현대 중국은 56개 소수 민족 집단들을 갖고 있는 하나의 중국이 아니라 몽골로이드 여러 민족 집단의 합중국(合衆國)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동적인 알타이어계 민족들은 창조적이지만, 정적인 한족계 민족은 알타이어계의 모든 것을 부수어 삼켜버리고 있다. 한족들은 북동부 중국에 있는 고구려와 만주-퉁구스어계 역사가 한족 역사라는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중국 전체의 역사는 몽골로이드 민족들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북동부 중국의 역사는 몽골로이드 합중국의 고구려와 만주-퉁구스어계의 역사다.

황하문명은 몽골로이드 문명
중국 문명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그 문자 전통에 있다. 이집트 신성문자가 이집트 문명의 기초적 요소였듯이, 중국어 글자는 역시 중국 문명의 기본이다. 이 두 글자 모두 상형문자이므로, 일(日, sun), 구(口, mouth), 목(目, eye), 인(人, person) 같은 비슷한 형태의 문자가 많다.

그러나 상·하 이집트가 BC 2850년에 통일된 직후 이집트 신성문자가 만들어졌고, 반면에 가장 오래된 중국어 글자인 갑골문자는 BC 1300년쯤 이후에야 알려지기 시작했으므로, 이집트 신성문자는 중국어 글자보다 1500년 이상 오래 되었다. 이런 시간적인 차이는 이집트의 필기 체제나 그 기본구조가 중국이나 고조선을 포함한 기타 알타이어계 지역들에 도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갑골문자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 꼭 중국인이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고 본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연대가 BC 5000년대까지 올라가는 내몽골에 있는 홍산문화 지역과 기타 고고학 유적지들을 둘러보았다. 이런 연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오랜 연대와 비교되는 것으로, 우리는 우랄-알타이어계, 시노-티베트어계, 남아시아어계(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오스트로네시아어계, 그리고 몽골로이드들이 사용하는 기타 어족의 조상들이 모두 이 오랜 문화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역은 또한 고조선의 영역이기도 하면서 발해만과 서해(황해)와 마주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형구 교수와 함께 그곳 바다를 ‘고조선의 지중해’라고 부른다. 이것은 중국 본토 서쪽까지 포함하는 일명 황하 문명이 분명 순전한 중국인 문명이 아니라, 고조선인들을 포함한 알타이어계 민족들이 한족과 기타 몽골로이드 민족들과 함께 만든 몽골로이드 문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미즈 키요시 : 순천향대 초빙교수, 극동대 겸임교수·언어학><후원 : 대순진리회
 
 
[특별기획]‘이나바의 하얀 토끼’ 고향은 고구려 - 2007 12/04   뉴스메이커 752호
 
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 언어학적으로 토끼와 관련된 고구려 언어가 사할린·홋카이도 지역에 영향
고대 한국어의 어근을 추적하면 고구려의 영향력이 동해를 지중해 삼아 훗카이도, 사할린의 고아시아족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한 종족 집단의 문화적 유산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 보존돼 있다. 유전학에서 DNA의 역할은 언어학에서 단어의 어근과 비슷하다. 내가 한국인의 기원을 추적하는 24일간의 답사 여행에 참가한 목적은 이른바 ‘코리안 루트’ 주변에 남아 있는 한국어의 ‘언어 유전자’를 찾는 것이었다. 역사적 유물과 유적은 사라질 수도 있지만 단어 어근은 그 언어를 여전히 사용하는 한 계속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끼와 거북이’ 세계 곳곳서 내려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토끼 이야기'에서 토끼는 트릭스터이자 메신저다. '이나바의 하얀 토끼'도 동해를 건너 고구려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일본 열도에 알린 메신저였다.
고대 한국어의 어근들을 포함한 알타이어 어근들의 목록을 완전하게 작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중국에 있는 만주-퉁구스들은 더는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빠른 속도로 중국에 동화해가고 있다. 그보다는 덜하지만 내몽골인들 역시 중국에 동화해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고대 한국어의 어근을 찾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믿는다면, 언어도 인류가 수만 년 동안 이동하고 교류하면서 분화한 결과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아프리카처럼 먼 곳의 언어 속에서도 우리 동아시아와 연결되는 언어 코드가 숨어 있을 수 있다. 한국어의 유전자를 찾는 일을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서부 아프리카의 깊숙한 내륙에 위치한 북부 나이지리아의 여러 마을에서도 채집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 오지에까지 퍼진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이솝 우화가 사하라 사막을 거쳐 내려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의 경로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즉 원래의 아프리카 이야기가 사하라 사막을 타고 올라가 지중해 세계로 전해져서 그리스의 이솝이 기록으로 남긴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토끼는 하나의 트릭스터(trickster, 속임수나 장난으로 질서를 어지럽히는 신화적 형상)다. 토끼는 상대방을 터무니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어 놀리고 조롱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결국 토끼의 이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어리석은 상황에 빠지게 한다. 토끼는 경기 상대인 거북이를 조롱하지만, 도중에 잠을 너무 많이 자 결국 거북이에게 지고 만다. 이솝은 분명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지 말라는, 혹은 자신의 능력에 자만하지 말라는 도덕적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토끼의 트릭스터 성격은 ‘이나바의 하얀 토끼(因幡の白うさぎ)’라는 일본 이야기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이 이야기는 신화 범주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 모신 오오쿠니누시노카미(大 神)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나바(因幡), 혹은 인슈(因州)는 사닌도(山陰道)의 고대 지방 8개 중 하나이며, 돗토리 현(鳥取縣) 동부 지방의 옛 지명이다.

‘이나바의 하얀 토끼’는 바다를 건너가고 싶어했다. 자기의 고향 땅 고구려를 방문하기 위해 고구려의 동지중해(동해)를 건너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와니자메(鰐鮫)라고 불리는 무서운 상어들을 모아놓고 그 등을 건너 뛰어 가려고 한줄로 늘어 놓으려는 꾀를 부렸다. 그러나 상어들이 그 꾀를 알아채고 토끼를 잡아 털과 가죽을 모두 벗겨버리고 만다.

바닷가에 발가벗겨진(赤裸, あかはだか, aka-hadaka, 발가벗다, 알몸뚱이) 채 있는 토끼를 발견한 오오쿠니누시노카미가 토끼를 도와주었다. 오오쿠니누시노카미는 기키 신화(記紀神話, 서기 712년 백제 귀족인 오오노야수아마로(大野安麻呂)가 편집한 ‘코지키(古事記)’ ‘キ’와 720년 쓰여진 ‘니혼쇼키(日本書紀)’)에 나오는 주요 신 중 하나다.

아무르강 길략족 언어서도 발견

오오쿠니누시노카미는 고구려 출신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 신은 아시하라 노 나카투쿠니(葦原あしはらの中つ )라는 나라를 세웠고, 나중에 왕위를 물려주고 이즈모타이샤로 은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러시아 부리야트공화국 울란우데 부근 부교도 마을의 민속 공연.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미키 마우스나 도널드 덕 같은 동물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영어를 알건 모르건 이 단어들에 포함돼 있는 ‘마우스(mouse)’와 ‘덕(duck)’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강력한 나라의 문화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먼 지역에까지 급속히 퍼져가는 것이다.

동아프리카 스와힐리어(Swahili)로 ‘책(book)’은 ‘키타부(kitabu)’인데, 서아프리카 하우사어(Hausa)로는 ‘리타피(littaafi)’이다. 이것들은 원래 아랍어 ‘kitaabu(-n)’나 아랍어 정관사 ‘al-(the)’을 갖고 있는 ‘al-kitaab’에서 온 것이다. 물론 ‘책(The Book)’이란 모슬렘에게는 성서인 코란(the holy book, al-Qur’an)을 뜻하는 것이다. ‘al-kitaab’는 모로코 아랍어(Moroccan Arabic)로 ‘ilktaab’인데, 서부 아프리카에서 ‘*liktaaf’로 바뀌었으며, 그것들은 오늘날의 현대 하우사어(Modern Hausa)와 많은 다른 북부 나이지리아의 언어에서 ‘littaafi’로 남아 있다.

우리의 불쌍한 ‘이나바의 하얀 토끼’는 일본어로 ‘이나바노 시로 우사기’다. ‘토끼(hare, rabbit)’란 단어는 고대 및 현대 일본어로 ‘兎· うさぎ?おさぎ usag-i < osag-i’다. 고구려어로 ‘토끼’는 ‘烏斯含 *osag-am’이다. 한국어 ‘토끼<톳기 thoski’에서 ‘-oski’부분은 고구려어 및 일본어와 유사하지만, 중국어 ‘[ 토]tho-’가 그 앞에 붙어 있어서 중국어-한국어 합성어(Chinese-Korean compound)가 만들어졌다.

규슈 대학의 이타바시(板橋義三) 교수에 따르면, 토끼와 관련한 이 고구려어 단어는 니브흐어(Nivh)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이 니브흐어는 아무르 강 하류에 사는 길략족(Gilyak) 사람들의 언어인데, 이들은 토끼를 ‘오스크(osk)’라고 하며, 그로부터 사할린과 홋카이도에 사는 아이누족(Ainu) 사람들의 언어로 ‘오스케(oske, 兎)’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고구려의 지중해를 건너 남쪽의 이즈모(出雲)로부터 북쪽의 사할린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윤명철 교수가 보여준 통일신라와 발해(서기 698년~926년) 지도(우리 역사지도, 2006년)는 이런 상황을 매우 잘 형상화하고 있다.
일본에는 ‘이나바의 하얀 토끼’와 ‘토끼와 달’에 관한 어린이 동요가 있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兎, 兎, 何見て跳ねる? 
十五夜お月樣見て跳ねる.
(토끼야, 토끼야, 무얼 보고 높이 뛰니?
둥근 보름달 보고 높이 뛰지.)


프랑스에도 ‘Au clair de la lune, mon ami piero’(달빛 아래 나의 친구 피에로)란 동요가 있다. 영어의 ‘lunatic(머리가 좀 돈)’은 프랑스어 ‘la lune(달)’에서 기원한 것이다. 한낮의 더운 날씨가 지나고 보름날 밤의 시원한 달빛 아래 인간은 모두 낭만적으로 바뀐 것이다. 토끼가 뛰어오르면, 아이들은 춤추기 시작한다. 젊은 연인들은 들떠서 서로 꼭 껴안는다. 피에로(어릿광대)의 성격은 ‘우스운(comic)’ 것이기도 하고 또 ‘슬픈(sad)’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토끼의 트릭스터적 성격은 피에로의 성격과 다소 유사하기도 하다.

城에 해당하는 일본어 한국어에 기원

대보름 십오야(十五夜)는 한국인들에게 특별하다. 하지만 왜 달에서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는 것일까. 언어학적으로 그 해답을 풀어보기로 하자. 일본어로 ‘떡방아 찧기’와 ‘보름달’은 발음이 거의 똑같다. 즉 ‘모치 투키(餠搗もちつき, 떡을 침)’와 ‘모치 두키(望月もちづき, 보름달)’다. 보름달 ‘모치 두키’ 안에 토끼의 형상이 있다고 상상해보면, 그 모습은 마치 떡방아 찧는 ‘모치 투키’의 모습인 것이다.

한국어로 ‘보름(달)’은 일본어로 ‘모치(두키)’다. 그래서 ‘떡은 ‘모치(餠, もち)’다. 이 두 한국어 단어의 어두자음 ‘p-’는 고조선어(Old Chosun)에서 기원한 것이며, 그 고조선어는 고구려어에서 ‘m-’으로 바뀌었다가 앞에서 말한 2개의 일본어 단어 형태로 남은 것이다.

일본에는 한국식으로 지은 성과 요새들이 남아 있다. 내가 예전에 산책을 다니던 후쿠오카 현(福岡縣)에 있는 오오노조우 성(大野城)은 전형적인 조선식 산성이다. ‘성(castle)’이나 ‘요새(fort)’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3개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국어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중 하나가 고대 일본어 サシ(sas-i <*cas-i, ‘니혼쇼키’ 神功紀 五年 등)다. 이것의 한국어 형태는 자시라(cas-ira, ‘月印釋譜’ 第一六)와 잣(cas, ‘訓蒙字會’ 八)이다. 이렇게 볼 때 아이누어(Ainu) 형태인 チャシ(cas-i)는 일본어를 거쳐 온 것이 아니라 한국어에서 직접 차용해온 것임에 틀림없다.

아프리카에서 토끼는 트릭스터이기도 하지만 또한 누가 오는지, 그리고 무슨 일이 닥쳐오는지를 빨리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전달자(messenger), 혹은 예고자(harbinger)로 알려져 있다. 토끼는 고구려의 지중해를 건너서 다가오는 고구려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조몽시대 사람들과 아이누족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지중해를 건너가면서 한국식 성과 요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은 새로운 지배자가 진출해 세운 중요한 기지로, 새로운 문명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고구려 제국이 사라지고 100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고구려어에서 기원한 이야기와 단어들은 옛 영토와 그 영향권 아래 있던 지역들에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우리들에게 고구려 제국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 본문 내용 ‘떡은 ‘모치(餠, もち)’ 다.에서 떡은 뒤 ‘모치(餠, もち)’ 앞에 아래그림이 들어간다 .


<시미즈 키요시 순천향대 초빙교수, 극동대 겸임교수·언어학><후원 : 대순진리회>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start=36&pageok=1&code=116&pdate=
 
 
[특별기획]단군신화, 그리고 북방이야기 - 2007 10/30   뉴스메이커 747호
 
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  단일종족 신화 논리는 역사를 축소… ‘단군-게세르 계열’로 안목을 넓혀야
부리야트인들이 게세르가 알려진 후 1000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 1991년 이를 기념하여 셀렝게 강변 언덕에서 기념전을 열었다. <신동호 기자>

“우사, 풍백, 운사, 세오가 환웅을 보필하는 사신(四神)으로 설정되고, 태초의 혼돈 속에 벌어지는 선과 악의 투쟁이 현무, 백호, 청룡, 주작의 전투 장면으로 묘사된다. 농경사회의 상징으로 알려진 우사와 풍백이 실제로는 전쟁의 신이었고, 현무, 백호로 변신하여 지상의 악을 제거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재기발랄한 연출인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단군신화를 보는 시각의 일부다. 물론 ‘태왕사신기’에서 단군신화를 족조신화로 축소하며, 단일 종족신화를 강조하는 것은 신화를 통한 역사 왜곡으로 비난받을 수 있고, 고조선에서 분화한 다양한 종족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점이 될 수 있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단군조선의 경제적 기초가 농경이라는 상식화된 추론이 실제로는 막연한 추정일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북방신화인 ‘게세르’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단군신화의 얼개를 비교해보면 이러한 해석이 단순히 연출자 개인의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폄훼하기 어렵다.

단군조선 사회체제 접근 신중해야

프롤로그와 제1, 2부를 비교해보자. 게세르 신화에서는 신화 텍스트가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늘 세계의 회의, 하늘신 게세르의 지상 파견, 지상의 조화 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군신화에서도, 지상세계의 문제와 백성들의 도탄을 목격한 환웅이 환인의 허락을 얻은 뒤 우사, 풍백, 운사를 비롯한 전쟁신 혹은 최첨단 신무기를 갖추고 하늘용사 3000명과 함께 지상강림한다. 이후 신시로 불리는 하늘 신의 직접 통치구역을 설정하고, 지상에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악의 무리들을 제압한 뒤 지상과 우주의 조화를 복원한다. 이렇게 보면 두 신화가 닮은꼴이 아닌가? ‘불함문화론’에서 단군신화와 몽골계 부리야트인의 게세르 서사시를 유사한 내용이라고 한 육당 최남선의 말이 허언이 아니다.

‘주곡’이라는 표현을 농경사회의 유력한 증거로 내세울 수 있으나 단군신화가 유목에 가까운 북방 종족들의 신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면, 조금 더 조심스러운 시각으로 단군조선의 사회경제 체제를 논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에 농경을 상징하는 요소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회 전체가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성립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단군 초상. 일연이 채록한 단군신화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어쩌면, 단군신화를 농경사회의 흔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정주민 이데올로기가 첨가된 편견일 수 있다. 유목세계에 존재하는 닮은꼴 신화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바람’이나 ‘비’, ‘주곡’의 요소를 농경사회의 모티프로 추론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단군조선의 경제 기반을 농경에 연결하는 시도는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한반도의 거주자들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장치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범하지 않는 평화 지향의 정주민, 백의민족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위한 무의식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

단군신화를 농경사회의 정착 과정으로 설명하는 통설과 함께 여인으로 변한 웅녀를 두고서 곰족을 부각시키며 단군조선을 곰족의 국가로 해석하는 주장 역시 절반쯤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정말일까? 서울대 강정원 교수는 ‘북아시아 곰 관련 의례와 관념 체계’(비교민속학회 발표문, 2007)라는 논문에서 이 같은 상식의 우상을 부분적으로 허문다. 곰 관련 샤머니즘 제의를 시베리아에서 찾기 어렵고, 곰 제의와 샤머니즘과의 관련성이 의문스러워서 단군신화와 샤머니즘의 관계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이 말은 역으로 샤머니즘과 곰 토템 사이에 역사적인 관련성이 크지 않음을 인정하면 단군신화를 샤머니즘 신화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시베리아 곰 의례 관련 대표적인 연구자라 할 수 있는 한스-요하힘 파프로트의 저서 ‘퉁구스족의 곰 의례‘(태학사, 2007)에는 샤머니즘과 곰을 직접 연결시키는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자. 웅녀는 자신의 의지로 삼칠일간의 혹독한 수련을 통해 자신이 속했던 곰족의 행태와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곰족의 종족 이데올로기에서 홍익인간과 제세이화를 이념으로 하는 하늘세계의 보편적인 이념을 수용하는 존재로 전이한 것으로 말이다. 웅녀는 하늘 세계 이념을 공유하고 개별 종족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을 지향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인간이 된 웅녀에게 곰족이나 호족은 자랑스러운 혈통이 아니라 제세이화와 홍익인간의 교화 대상이다. 단군신화가 단일종족의 족조신화라는 좁은 범주가 아니라 고대의 제국 형성과 소멸 과정을 담은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있는 증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종족 복합사회 성격 간과 말아야

신화 텍스트를 살펴보면, 단군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다 웅녀의 자식이거나 혹은 단군의 직접적인 후손인 것도 아니다. 단군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곰족, 호족을 비롯해서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되지 못한 무리들을 인간으로 교화시켜 보편과 인간을 지향하는 다종족 이념사회인 고대 조선제국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고대 한반도와 북방 거주자들은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순혈 이데올로기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았음이 신화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

단군신화를 한민족 혹은 단일민족의 족조신화 혹은 건국신화로 보는 시각은 단군신화가 다종족 복합사회의 성격을 가진 제국의 신화인 점을 간과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단군조선에 대한 기억을 해체하며 조선의 영역과 범위를 축소하는 왜소한 접근이다. 단군을 단일종족의 족조신화나 건국신화로 주장하는 논리는 자신의 역사를 축소하는 논리를 생산해온 것이다. 신화 텍스트 속의 조선은 다종족, 다문화를 인정하고 이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이념을 공동가치로 지향하는 동아시아 고대 제국의 원형적인 성격을 드러내는데도 말이다. 신화 연구는 문학 텍스트의 세밀한 연구에서 출발해야 하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