處世
포커페이스
kongbak
2007. 12. 28. 09:53
포커페이스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교역량이 미국보다 앞섰다고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양국은 이제 서로 없어서는 안 될 교역국이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가 중국에 수출하는 대표적인 품목 중에 하나가 ‘한류(韓流)’다. 우리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을 반증하기에 뿌듯하다. 그러나 이제는 희희낙락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중국 농산물이 우리 식탁을 점령한지 오래고, 저임금, ‘짝퉁’으로 대변되던 싸구려 저질품 이미지를 빠르게 탈피하고 있다. 저가격, 고품질 제품이 속속 등장하면서 한국 상품이 설자리를 압박해오고 있다. 문화도 언제까지 일방적으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흐르란 법은 없다.
더욱이 문화란 우열보다 개성으로 서로 교류하는 특성이 있다. 시간차를 두고 서로 주고받는 다는 것이다. 한류 다음에 역으로 중국류(中國流)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중국과 문화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내가 가장 먼저 수입하고 싶은 중국류가 있다. 바로 ‘희노애락 불형어색(喜怒哀樂 不形於色)’이다. 얼굴빛에 울고 웃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포커페이스’라고 한다. 포크페이스의 달인이 중국인이다. 세계 교역의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할 미덕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상술은 유명하다. 전 세계 화교들이 진출해 어느 나라건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가 없을 정도다. 그들의 사업수완 밑천이 바로 喜怒哀樂 不形於色이다.
중국인들은 절대로 사업파트너의 인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 같으면 사업파트너에 대해 품성이나 취향 등을 이리 저리 재볼 테지만, 중국인들은 단지 금전적인 관계로 인간을 대한다. 성격이 맞건 안 맞건 철저하게 사업목적을 위해 대한다.
중국 상인들은 사업파트너가 위급하게 되면 절대로 냉정하게 돌아서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에게 손해를 입혔더라도 물적 도움을 계속한다. 이는 상대방을 배려해서가 아니다. 상대방이 망하면 거기에 투자한 자신의 본전에 손실을 입기 때문에, 일단 살려내서 나중에라도 받아내자는 속셈이 깔려있다. 적을 쫓으면서 한편으로는 구조선을 보낸다는 ‘위중구급(危中救急)’이 그네들이 자주 회자하는 말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해도 절대 화를 내 보복하거나 궤멸시키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기감정을 숨기고, 오히려 은혜를 베푼다. 이런 의미로 중국인들은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는 말을 자주 쓴다. 복수대신 유용한 물건을 보내 적대감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감정을 얼굴에 잘 안 드러내는 중국인들의 민족성 때문인지, 중국은 얼굴에 쓰는 가면이 매우 발달되어있다. 가면은 자신의 본 모습이나 감정을 숨긴다는 상징이 있다. 영화 ‘패왕별희’에도 잠시 등장했지만, 순식간에 가면이 탈바꿈되면서 십여 개의 얼굴 표정이 연출되는 장면은 영화 팬들의 뇌리에 오래 동안 남아있다.
중국인들의 포커페이스에는 유래가 있다. 고대에 도시가 발달하여 인구가 밀집되자, 사람들 붐비는 도회지 속에서 자기감정을 드러내면 불필요한 오해가 빈번해졌다. 특히 넓은 대륙에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이합집산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주군이 등장하는 와중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喜怒哀樂 不形於色는 ‘정중동(正中動)’을 말한다. 돌부처처럼 무심한 것이 아니다. 속으로는 부단히 움직이면서 상대방에게 내 수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 한미 FTA 협상과정을 보면서 포커페이스를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논란이 많지만 FTA 협상 결과는 훗날에야 정확히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협상과정에서 미숙한 점은 상당히 아쉬웠다.
회의 성격상 한미 협상과정은 언론에 일일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거리를 매일 내야하는 기자들이 회의장 주변에서 분주하게 협상결과를 스케치하게 된다. 그런데 한 기자가 관찰해보니, 협상 장 밖을 빠져나가는 미국 대표들의 표정은 한결 같아서 도저히 진행 상황을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대표들 얼굴에는 만족과 실망의 감정 표정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더라고.
역시나 공식적으로 결과를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발표를 맞춰보니 한국 대표의 표정 변화와 협상결과가 일치했다고 한탄했다. 미국 대표들은 한국 대표들의 감정 표정을 읽으면서 협상에 임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패를 보고 치는 게임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 아니냐며 걱정했다.
서구에서는 경제 실무자들에게 ‘바이어와의 협상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중에 포커페이스가 명시되어있다. ‘제시된 가격을 보고 설령 꽤 이상적인 가격이라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추가적인 협상여지를 남긴다.’ 돌아보면 한국 대표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들은 아직 정식 체결 협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 대표들에게 너무 적나라하게 감정을 내보이고 반응하고 있으며, 언론도 국익적인 차원이 아니라 신속성에 초점을 맞추는 사례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喜怒哀樂 不形於色이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희노애락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마음이 순수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고립된 인간이 자연과 살 때나 그런 것이다. 사람들끼리 밀집해서 사회생활을 할 때는 포커페이스도 하나의 지혜가 된다.
우리나라 사람은 돈이 있으면 은근히 자랑을 하고 다닌다. 이를 알아챈 주위사람들은 사장님, 회장님 하며 각종 존칭을 붙여가며 아첨을 한다. 결국은 아무리 부자라도 거덜이 나게 되어있다.
성공한 어떤 여류 사업가는 큰 계약을 하더라도 절대로 남편에게도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운(運)이 나간다는 것. 감정이 드러나면 남에게 속마음을 도둑맞는 다는 것이다.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이 되고 젖소가 물을 먹으면 우유가 된다. 喜怒哀樂 不形於色의 부정적인 측면은 교언영색이나 권모술수다. 아첨과 술책으로 상대방을 속이는 것.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유용한 협상전략이 된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큰 지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