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學산책

[사이언스 에세이] 수학이 필요 없는 나라

kongbak 2007. 11. 13. 15:50
[사이언스 에세이] 수학이 필요 없는 나라


미국에 국가안보국(NSA)이라는, 세계 각국의 통신을 수집하고 암호를 해독하는 정보기관이 있다.

요즘에는 CIA보다도 자주 영화에 악역으로 나오는데,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도망가는 주인공을 첩보위성이

생중계하는 <에네미 오브 스테이트>나 <머큐리>가 생각날 것이고,

 

시사뉴스에 밝은 이들은 휴대전화 감청, 위치추적 문제와 함께 언급되는 국제 도청협약 에셜론을 떠올릴 것이다.

한국에는 이에 해당하는 독립된 기관은 아직 없다.

한동안 미국 정부는 “No Such Agency”라며 NSA의 존재 자체를 공식 부인했었고 지금껏 견학도 허용하지 않는다.

한데 20년 전 현직 국가안보국장이 제 발로 미국 수학회 정기총회에 나타났다.

해마다 배출되는 미국인 수학박사의 숫자가 많이 줄었고 공개열쇠 암호가 발견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들은 미국 수학계의 앞날이 걱정된다며, 자기들의 통신첩보활동이 힘들어져 국가안보에 영향을 줄까 봐

어떤 정보기관도 상상하기 힘든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들은 저명한 수학자(물론 미국 시민권자들만) 100명을 초청해 출입에 필요한 일체의 번거로운 서류작업 없이,

신원조회도, 지문 채취도, 거짓말 탐지기도 거치지 않고, 이틀씩 두 번에 걸쳐 NSA 본부를 공개했다.

게다가 NSA의 전문가들이 초등학교에까지 찾아가서 강연하고 수학교육학회에도 참가했다.

그뿐 아니라 수학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안식년을 맞은 수학자를 교환교수로

 NSA에서 2,3년 지낼 수 있게 하고, 여름방학에는 우수한 학부생들을 모아 NSA가 해독중인 암호를 함께 풀어보도록 했다.

 NSA의 전문가 2명과 8명의 학부생들이 첫 해에 두 개의 암호를 풀어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비밀취급 인가를 위해 학생들의 신원조회를 하는 데만 몇 달이 걸린다.

지금은 수학회 모임에 NSA 직원이라며 명찰을 달고 참가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국정원 직원이라고

명찰을 달고 다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가?

우리가 지금도 특목고 입학용 영재를 풀빵처럼 찍어내고 고등학생들은 명문대 입학에만 사용할 경시대회에 매달리고 있을 때

 미국 대통령은 학생들의 수학 실력이 내려가서 걱정된다고 하거나 평균점수가 올라가서 기쁘다고 뉴스에서 말한다.

수학자인 나 자신도 그런 것은 정치인이 말로만 하는 립 서비스라며 믿지 않았었는데, 백악관의 누군가는 진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의 금융계 보험계 국방부는 차치하고,

자연과학자나 공학자도 수학이 정말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판국이다.

2차대전과 냉전을 겪으며 과학기술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껴보거나,

일본이 사고 싶어 안달하는 대당 가격 2,000억원 짜리 첨단 전투기를 만들거나,

우주로켓을 발사해 봐서 수학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낄, 그런 수준 근처에도 우리나라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앞으로도 싼 인건비와 짝퉁 기술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와 경쟁할 것인지 아니면

선진국으로 도약하려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가 바로 눈앞에 닥친 것 같다.

동북아 균형자가 되기 위한 자주국방이나 우주청 신설은 말로만 하고

 한국은 21세기에도 수학이 필요 없는 나라로 남아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