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
돌궐 제2제국기, 묵철가한과 돌궐 제2제국의 전성기 조회(912)
kongbak
2007. 10. 15. 21:23
일테리쉬 카간에 의하여 부활에 성공한 돌궐 제2제국은 그의 아우이자 2대 카간인 카파간 카간(黙啜, Bak-chor 691~716)대에 이르러 절정의 국력을 선보이게 된다. 전형적인 유목군주였던 카파간 카간은 즉위 이듬해인 692년부터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펴게 되는데, 최초의 목표는 영주(靈州, 현 요령성 남서부 朝陽)였다. 694년까지 카파간 카간은 영주의 중국 부락을 침공하여 그 지역을 초토화시키는데, 이는 당시 영주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거란과의 암묵적인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이룬 성과로 추측 할 수 있다.(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카파간 카간과 거란사이의 동맹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같은 정세는 696년에 이르러 급변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거란의 칸이었던 이진충(李盡忠)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 이 일로 인해 돌궐과 거란의 관계는 적대적 관계로 바뀌게 된다. 카파간 카간은 거란에 대한 연합작전을 위해 측천무후와 일시적인 연맹을 맺고 거란의 대군을 하북에서 격파한다. 이에 대한 대가로 카파간 카간은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진상품을 획득하게 되었고, 거란은 붕괴되고 만다.
 호쇼 차이담의 퀼 테긴 비문
카파간 카간은 투르크계 집단들에 대한 공세도 늦추지 않았는데, 696년과 697년에 걸쳐 케룰렌강 상류와 예니세이강 상류에 각각 거주하던 바이르쿠(Bayirqu)와 키르기즈인들을 차례로 격파하였다. 이 원정에서는 쿠틀룩의 아들이자 카간의 조카였던 묵극련(黙棘連, 빌게 카간Bilge Qaghan)과 당시 13세에 불과하던 퀼 테긴(KulTagin)의 활약이 두드러 졌다. 카파간 카간 이후 빌게 카간 시절에 세워진 호쇼 차이담(Khosho Tsaidam) ‘퀼 테긴 비문’에 보면
“창이 빠지는 눈을 헤치고 쾨그멘 산을 넘어서 키르기즈 백성을 쫓아 물리쳤다. 우리는 그들의 카간과 송가산에서 싸웠다. 퀼 테긴은 바이르쿠의 흰색 준마에 올라타 덤벼들었다. 한 사람을 활로 쏘았는데, 두 사람의 허벅지를 관통하였다. 그 접전에서 그들은 바이르쿠의 흰색 준마의 허벅지를 부러뜨렸다. 우리는 키르기즈의 카간을 죽였다. 나는 그의 나라를 거기서 빼앗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원정으로 카파간 카간은 제국의 북쪽과 동쪽을 완전히 복속시켜 약1세기 전 무한 카간 시절 동돌궐 제국 최대 영역을 거의 회복하게 된다.
한편 측천무후는 카파간 카간의 도움으로 동북지역의 골치덩어리였던 거란의 세력을 일소할 수 있었다. 비록 그 대가로 엄청난 양의 진상품을 보내야 했으나, 무후는 그 이후에도 카파간 카간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과 카파간 카간 간의 우호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조카와 카간의 딸 간의 혼인까지 제안한다. 그러나 호전적인 돌궐의 카간은 무후의 소박한 소망을 무참히 깨어버리고 톤유쿡과 조카인 묵극련에게 남정을 명령, 위주, 정주, 병주, 유주, 조주을 짓밟고, 산둥지방과 그 이남까지 진출하여 23개의 주요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돌궐의 흉폭한 군대는 그들이 철수하기 직전 수천의 포로들을 남김없이 학살함으로서 자신들의 호전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698년 말, 카파간 카간은 공세의 방향을 서쪽으로 변경했고, 묵극련과, 퀼 테긴의 군대는 준가리아의 투르퀴즈를 섬멸하고 서돌궐의 두 집단이었던 돌육과 노실필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700년 톤유쿡의 지휘로 돌궐의 군대가 재차 서진하면서 소그드인을 복속시키고 실크로드의 교역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 돌궐은 아랍 세력과 최초로 접촉한다. 이로써 카파간 카간의 제국은 발하쉬, 일리, 이식쿨, 추, 탈라스,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을 완전히 병합하게 되었고, 돌궐 제2제국은 550년의 대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일테리쉬 카간에게 붙잡혔던 오질륵(烏質勒)의 계승자이자 투르기쉬의 칸이었던 사갈(沙葛)이 서돌궐의 세력을 규합하여 카파간 카간에게 대항했으나 711년경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카파간 카간은 이제 러시아 초원을 제외한 유라시아 스텝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6~7세기 돌궐제국의 판도
701년 초 묵극련과 퀼 테긴의 군대는 탕구트의 세력을 일소하고 산서 북부의 오르도스 지방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다. 이듬해 무후는 위원충(魏元忠)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돌궐에 대항하게 하였으나 오르도스 남부에서 크게 패하여 위원충은 당시 16세에 불과하던 퀼 테긴에게 생포당하고 만다. 706년 퀼 테긴의 군대는 사탁충의(沙矺忠義)가 이끄는 8만의 당군을 명사(鳴沙)지방에서 격멸시키고, 영주 변경의 군진을 약탈한다. 당 중종은 크게 노하여 카파간 카간의 목에 왕자의 칭호와 비단 2000필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 승리에 대한 기록 역시 퀼 테긴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스물한 살 일 때 우리는 차차 생귄과 싸움을 하였다. 맨 처음에 타디킨 초르의 회색 말에 올라타고 싸웠다. 그 말이 거기서 죽었다. 두 번째 이쉬바라 얌타르의 회색 말에 올라타고 싸웠다. 그 말이 거기서 죽었다. 세 번째 예게르 실릭 벡의 옷을 입은 적갈색 말에 올라타고 싸웠다. 그 말이 거기서 죽었다. 그의 무기에 그의 소매에 100개도 넘는 화살이 날아왔다. 그의 얼굴에 그의 머리에 하나도 미치지 못했다. 그즐이 싸웠던 것을 투르크 벡들이여, 너희는 모두 알리라. 그 군대를 거기서 우리는 없애버렸다."
 돌궐 기마병
711년까지 카파간 카간의 돌궐 제2제국은 돌궐 제1제국 시기의 영역을 거의 완전하게 회복한다. 그러나 711년을 정점으로 돌궐의 기세가 꺽이게 되는데, 이는 서쪽에서 성장하던 우마이야 왕조와의 적대적인 접촉 때문이었다. 우마이야의 총독이었던 쿠타이바 빈 무슬림(Qutaiba B. Muslim)은 돌궐 제국령의 트란스옥시아나에 침입, 부하르와 사마르칸트를 빼앗았다. 이어 투르키즈와 카를룩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당 중종의 군대 역시 이에 호응하였다. 713년 묵극련과 퀼 테긴이 타미르 강변에서 이들을 진압하는데 성공하나, 트란스 옥시아나에서 돌궐의 세력이 축소되는것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714년에 이르러 토쿠즈 오구즈가 반란을 일으켰고, 트란스옥시아나는 돌궐의 권역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716년 케룰렌 상류에서 바이르쿠가 반란을 일으켰다. 카파간 카간은 친정을 하여 툴라 유역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지만 귀환 도중 바이르쿠의 패잔병들에게 암살당하였다.(716년 7월 22일) 그 의 수급은 바이르쿠에 의해서 당 황제에게 진상되어 장안으로 보내졌다. 유라시아 초원의 절대군주였던 카파간 카간은 그의 업적과 위상에 걸맞는 않는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하였고, 이는 돌궐 내부의 심각한 혼란으로 이어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