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라시아 대륙의 동남부에 있으며, 1949년 이후 중국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통칭 중국)과 대만의 중화민국(中華民國)으로 분단된 나라.
면적은 대륙이 약 960만㎢로 세계 육지 면적의 15분의 1과 아시아 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 나라의 44배로 세계 제3위이다. 대만이 약 3만5981㎢이다. 인구는 1997년 중국이 12억3000만 명이고, 대만이 2160만명이다. 수도는 중국은 북경(北京)이고, 대만은 타이베이(臺北)이다.
중국 인구의 대부분은 한족(漢族)이며, 몽고(蒙古)·회(回)·장(藏)·묘(苗)·조선족(朝鮮族) 등 56여 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이들 소수민족은 전체 인구의 약 6%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의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50∼60%로 대부분 변경지역이다.
중국의 일관된 민족정책에 따라 각 민족간의 평등이 보장되고 있고, 자신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공식어는 북경어(北京語)이다.
대만 인구의 약 89% 이상은 타이완인〔臺灣省籍者〕이고, 1949년 전후에 국민당 정부와 함께 건너온 외성인(外省人, 本土人)과 소수의 원주민족인 고산족(高山族)이 있다. 이주민의 출신지에 따라 푸젠계(福建系)·광둥계(廣東系) 등의 지방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나 공식어는 북경어이다.
기후는 중국이 대륙성계절풍의 영향으로 일교차와 월교차가 매우 심하며, 강수량이 많고 북경시의 연평균 기온은 12°1′C이다. 대만은 아열대성기후로 날씨가 덥고 비가 많이 오며 바람이 많다. 타이베이시의 연평균 기온은 22°4′C이다.
종교는 불교·도교·회교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특히 불교와 도교는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중국인의 정신생활에 침투하고 있다. 기타 천주교와 기독교도 일부 차지하고 있다.
중국사 전개에서 큰 구실을 한 한민족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 황하강의 상류·중류 지역에서 농경민족으로 나타났다. 전설에 의하면 상고의 삼황(三皇)·오제(五帝)의 평화시대를 거쳐 하(夏)·은(殷)·주(周) 3대의 왕조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삼황오제설은 후세의 사상상(思想上)의 산물에 지나지 않고, 3대 이후가 역사성을 갖는 것으로 인정된다. 다만, 하왕조는 공자(孔子)가 살던 춘추시대(春秋時代)부터 알려졌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실증되어 있지 않다.
은나라는 기원전 1500년경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번영하며 청동기문화와 갑골문자를 사용하였다. 기원전 11세기경에는 산시성(陝西省) 남쪽에서 주나라가 일어나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봉건적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기원전 8세기경에 이르자 주나라는 제후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고, 또 북방민족의 침입도 자주 있자 수도를 낙읍(洛邑)으로 옮겼다.
그 이후는 춘추전국시대로, 이 시대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각 제후 밑에서 산업·문화·군사를 부흥시켰고, 이것은 그 이후 중국 문화의 원천이 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건설하였는데, 중국을 칭하는 지나(支那)라는 명칭의 기원은 바로 이 진(Chin)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너무 엄격한 법률지상주의 정책을 편 결과 멸망하고,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에 의하여 한(漢)왕조가 시작되었다.
한나라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한문화를 집대성하였다. 2세기 말부터 황건(黃巾)의 난과 함께 천하는 군웅할거의 상태가 되어 589년 수(隋)에 의해 천하가 통일될 때까지 위(魏)·촉(蜀)·오(吳)의 삼국시대와 5호16국시대를 거쳤다.
수나라는 대운하를 건설하여 남북 교통을 편리하게 하였으며, 과거제도를 시작하였다. 대외적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패함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멸망하고, 618년 당(唐)나라가 건설되었다. 당의 여러 제도는 이후 중국 역대 국가 통치체제의 전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일본·월남에도 도입되어 통치의 기본 조직이 되었다.
당 멸망 후 중국은 다시 분열하여 군벌들이 각지에 정권을 수립하는 5대10국의 양상을 보였으나, 960년 송(宋)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었다.
그런데 북방에서는 거란·여진·몽고족이 차례로 요(遼)·금(金)·원(元)을 건국하여 그 세력이 자못 성하였다. 13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몽고족에 의한 대정복왕조가 출현하여 유럽과 아시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일시적 무력의 우위로 한민족을 정복한 원은 인구와 문화 수준의 열세를 어찌할 수 없어 중원에서 쫓겨났고, 1368년 명(明)이 건국되었다. 명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송나라 이래 발달된 군주 독재의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확립하였다. 17세기 초 만주 여진족의 청(淸)이 북경에 들어와 명을 대신하여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청은 명의 정치체제를 계승하여 강대한 제국을 형성했으나, 18세기 말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반란으로 농민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지고 사회적 불안도 가중되었다. 더욱이, 1842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었다.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과 청일전쟁의 실패 등은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청조 아래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했으나, 보수파의 반격에 의해 실패하고 정부의 비호 아래 의화단(義和團)의 난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척외운동도 외국 군대의 힘으로 진압되자, 이후 중국에 대한 외세의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한편, 삼민주의를 제창하고 청조를 타도하여 공화제를 수립하려는 쑨원(孫文)의 혁명운동은 이 무렵부터 더욱 그 세력을 증대하여 드디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성공, 1912년 중화민국을 수립하여 쑨원이 임시총통에 선출되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혁명당이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군벌들의 총수인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얼마 되지 않아 정식 대통령이 됨으로써 그 뒤 약 20년간 중국의 일반 대중은 군벌의 압제에 시달렸다.
5·4운동 이후 쑨원은 광둥에 정부를 세우고 국민당(國民黨)을 결성, 북벌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북벌 도중 쑨원이 죽자 그 과업은 장제스(蔣介石)에게 인계되었으며, 1928년 전국을 통일하였다.
마오쩌둥(毛澤東)의 군은 국민정부군과의 전투에 패하여 1934년에서 1936년까지의 기간에 대장정(大長征)을 완료했으며, 그 이듬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과의 항일공동전선을 펴기 위하여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성공시킴으로써, 1937년에서 1945년까지 중국공산당은 막강한 정치세력의 기반과 병력을 구축하였다.
1949년 4월 공산군은 양쯔강을 건너 단기간에 중국 본토를 제압하고 같은 해 5월 국민당정부는 대만으로 옮겼다. 공산당은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북경에서 소집하여 그것을 근거로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우리 나라와의 관계(1) 역사적 관계 선사시대부터 중국 대륙과의 관련이 깊었으며, 특히 위만(衛滿)의 침입과 한무제(漢武帝)의 침입으로 중국과의 접촉이 많아지고,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에는 중국식 문화가 이식되었다. 중국인들은 고조선의 여러 종족을 포함하여 중국의 동쪽에 있던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는데, 중국 선진(先秦)의 문헌에 동이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의 여러 민족도 일찍부터 중국과 접촉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고대의 중국인들은 동이에 대하여 다른 이민족에 비해 문화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여 친근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자도 ≪논어≫에서 “동이가 있는 곳에 살겠다〔欲居九夷〕.”고 하였고, ≪맹자≫에서는 중국의 전설적인 현군 순(舜)도 동이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 이루어진 ≪전국책 戰國策≫·≪관자 管子≫ 등에서이며, 이들 기록에 따르면 조선은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동쪽에 있고,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산출하여 중국에서 그것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말 중국의 은나라가 망한 뒤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 왕실의 친척인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여 기자조선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자가 봉해졌다는 최초의 기록은 전한(前漢) 때의 문헌인 ≪상서대전 尙書大傳≫과 ≪사기≫에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은나라가 망하고 800여 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며, ‘조선’이라는 명칭도 은나라가 망한 뒤 적어도 600년 이후의 기록에 보이기 때문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된 전설일 가능성이 많다.
전한 초기에 한의 제후국인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94년에 위만조선을 세웠다. 그가 멸망시킨 나라가 기자조선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우나 새로 나라를 세운 것은 사실이며, 위만이 조선에 올 때 상투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동이 계통의 사람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한 시기는 중국 대륙에서 후한 이후 삼국(三國)·남북조(南北朝)의 분열기를 거쳐 통일제국인 수·당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한다. 고구려는 이미 기원전 1세기에 국력이 성장하여 중국을 자주 괴롭혔다. 그러나 부여는 중국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부여는 삼국보다 일찍이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기원전 1세기의 기록인 ≪사기≫에 그 이름이 보이며, 49년에는 부여 왕이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
또한 부여 왕은 낙랑군과 현도군을 공격한 일도 있다(111·167). 하지만 중국과는 대체로 우호적이었고, 122년 고구려가 현도성을 포위했을 때는 원병으로 이를 구원하기도 하였다.
5세기에 한반도 및 요동·만주 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삼국의 주도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는 6세기 후반에 들면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왕은 당시 중국이 남북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북조의 북위(北魏)·동위(東魏)·북제(北齊)·북주(北周) 등과 차례로 통교하는 한편, 바다를 통해 남조의 동진(東晉)·송·제(齊)·양(梁)·진(陳) 등에도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도모함으로써 중국 세력을 견제하고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예방하였다.
그러나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고(589),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수나라와 직접적인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우호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였다.
한편, 4세기 후반에 그 세력이 커져 남조의 동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통하여 북의 고구려를 견제하던 백제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표면상 친화를 유지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이를 경계하고 왜(倭)와 연결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이 수나라에 대항하여 연결되는 반면, 신라는 오히려 수나라에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기에 앞서 고구려는 598년(영양왕 9)에 말갈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서(遼西)지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수나라 문제(文帝)는 3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큰 타격을 입고 철수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마침내 이로 말미암아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났다.
당나라 고조(高祖) 때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꾀하여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포로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으로 주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고구려에도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고구려는 16년간에 걸쳐 요동(遼東)지방에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았다.
644년, 드디어 태종은 오랜 준비 끝에 요동에 침략군을 보낸 후 이듬해에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50만 대군으로 2개월이 지나도록 작은 산성인 안시성(安市城)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 결국 철군하고 말았다. 2년 뒤 태종은 다시 고구려를 침입할 계획이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장기전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 뒤 당나라 고종(高宗)은 거듭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663년 드디어 신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668년에는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9도독부(都督府)를 두었으며, 또 평양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옛 땅뿐만 아니라 백제의 땅과 신라까지 그 지배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직후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한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라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아 고구려가 망한 지 8년이 지난 676년에 당나라 군사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지역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었다.
삼국시대 한·중간의 문화관계를 보면,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자문화(漢字文化)가 계속하여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한자 및 유교 문화의 보급은 삼국의 가족제도와 국가체제상 유교적 이념과 제도, 그리고 교육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함께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는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호국신앙으로서의 기능이 매우 컸으며,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문화는 우리 문화의 유산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고대의 중국은 이민족의 내왕과 문물교류에서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많은 승려와 학자가 중국에 가서 불교와 유학을 배우고 그 경전을 가져왔으며, 최치원(崔致遠)과 같이 그곳에 가서 수학한 후 과거에 합격하고 문필로 활약한 인물도 많았다.
또, 중국의 산둥반도와 그 밖의 지역에는 신라인의 거류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있었고, 그들 거류민은 오늘날의 치외법권과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진·한의 통일 이후 중국의 이민족에 대한 조공관계(朝貢關係)는 서서히 제도화되어, 처음의 삼국 대 중국관계는 정식조공이 아니라 입조(入朝)에 불과하던 것이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정기적인 조공관계가 성립되었으며, 오랜 세월을 거쳐 명·청시대에 완비되었다.
고려가 건국했을 때 중국은 오대(五代)의 혼란기였다. 당나라가 망한(907) 뒤 후량(後梁)이 섰으나 그 또한 얼마 되지 않아 망하고(923), 이어서 후당(後唐)·후진(後晋)·후한(後漢)·후주(後周) 등 모두 5왕조가 차례로 교체되었으며, 주변 지역에서도 10국이 흥망을 거듭하는 혼란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들 여러 나라와 고려는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문물의 교류와 조공을 통한 우호적 접촉을 유지해 갔다.
고려는 정치적 지원이나 물자의 교역 및 선진 문화의 수입 등을 목적으로 5대 제국(諸國)과 교섭을 계속하였으며, 5대 제국은 고려로부터 전적(典籍)을 얻어 가는 등 문물 교류를 통하여 이익을 보는 면이 많았다.
이러한 관계는 후주를 이은 송나라와의 교섭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때는 북방의 거란·여진·몽고족이 차례로 일어나 큰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그 관계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매우 어렵고도 복잡하였다.
송나라와 고려 간에 국교가 처음 열린 것은 962년(광종 13)이었다. 두 나라는 오랫동안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는 송에 대하여 친선외교를 폄으로써 중간에 끼어 있는 거란이나 여진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함께 송의 선진 문화를 수입하려 하였다.
이에 비하여 송은 국초 이래로 문치주의를 채택한 결과 국방력이 극히 약화되어 동북으로부터 강대한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연이어 받고 있었으므로 고려를 통하여 그들의 압력을 배후에서 견제하려는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처럼 두 나라는 서로 처지를 달리했지만 우호적인 관계는 끝까지 유지되었으며, 공식적인 조공관계나 비공식적인 접촉을 통한 문물 교류는 자못 성하였다.
거란의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로 고려 초부터 고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거란은 3차(993·1010·1018)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과 강감찬(姜邯贊)의 구주대첩으로 실패하였다.
여러 차례의 침입에서 요는 번번이 대패했고, 고려 또한 오랜 전란에 지쳤으므로 두 나라는 서로 화평을 바라게 되어 1019년(현종 10)에 두 나라간에 화약이 성립되었으며,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대체적으로 평화관계가 유지되었다.
한편, 여진족은 본래 고려에 순종하여 투화(投化)하거나 조공을 바치다가 10세기 이후 그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고려의 북변을 침범하게 되었다. 이에 1107년(예종 2)에는 윤관(尹瓘)이 17만의 대군으로 그들을 토벌하고 9성(城)을 쌓았으며, 2년 뒤 여진족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청을 받아들여 9성에서 철수하였다.
1115년 여진족은 금(金)나라를 건국한 뒤 고려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로 국교를 맺을 것을 청하였으며, 1125년(인종 3) 요나라를 멸망시킨 뒤 금나라에 간 고려의 사신이 칭신(稱臣)하지 않는다 하여 고려의 국서를 받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당시 고려조정의 실권자 이자겸(李資謙)은 중의의 반대를 물리치고 금에 사신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취하기로 하였다. 그 뒤 고려조정에서는 북벌론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두 나라 관계는 그 후 약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금나라의 국력이 쇠퇴해 가는 13세기 초 몽고족이 대륙의 북방에 흥기하여 급격하게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는데, 같은 시기에 만주 방면에서는 거란족의 후예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거란족은 1216년(고종 3) 9만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한 일이 있으며, 거란족의 유적(流賊:떠돌아다니며 노략질을 하는 도적)들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이에 몽고의 칭기즈칸(成吉思汗)은 1219년 고려에 원군을 보내어 거란의 유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그 뒤 몽고는 고려에 많은 공물을 요구했는데,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고 몽고의 사신을 냉대하였다. 그러다가 1225년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두 나라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1231년에 제1차 몽고침입이 있었다. 불시에 침입을 당한 고려는 당시의 집권자 최우(崔瑀)의 주장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그 뒤 30년간에 걸친 몽고의 여러 차례의 침입과 약탈로 인하여 1258년 고려조정의 출륙과 태자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두 나라가 강화를 맺었다. 그리하여 약 30년에 걸친 침략과 항쟁이 끝나고 두 나라의 관계는 다소 원만해졌다.
그러나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과 영향력은 고려의 왕실·정치제도·습속 등에 크게 작용하였다. 두 왕실의 통혼으로 고려의 왕이 원의 공주나 종실(宗室:왕의 친족)의 딸과 혼인하여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으며, 고려의 관제나 칭호가 원의 제도와 상등한 것은 변경하여 원과의 차이를 표시하였다.
또, 호복(胡服)과 변발 등 몽고의 생활풍습과 몽고어가 침투하였고, 경제적·인적 착취도 강화하여 무리한 공물과 공녀를 요구하였다. 문화관계에서는 원나라의 학문과 서예가 전래되었고, 성리학이 전래되어 조선왕조의 이념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중국과의 관계는 곧 명·청의 관계인데, 조선 초기 명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는 않았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에 대한 명의 소극적인 태도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한 두 나라의 세력관계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몇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한 직후의 문제로 태조의 즉위를 명나라가 승인하는 문제, 공로(貢路)를 폐쇄한 문제, 표전문제(表箋問題), 통혼문제, 명제로부터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는 문제 등은 사신 내왕과 교섭 결과로 몇 년 사이에 해결되었으나, 여진문제와 세공문제, 그리고 화자(火者)와 처녀의 진헌(進獻)문제는 오랫동안 두 나라간의 현안(懸案)이 되었다.
이러한 현안들도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두 나라 사이의 문물 교류가 성해짐에 따라 해결되어 조명관계는 원만해지고,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 사이에는 점차 사대(事大)·숭명(崇明)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명의 원조를 계기로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명 간의 평화적인 관계는 북방의 여진족이 다시 흥기하여 1616년(광해군 8) 누르하치(奴兒哈赤)가 후금(後金)을 건국함으로써 위협을 받게 되었다.
태조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호전적이어서 1627년(인조 5) 봄 조선에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1636년 국호를 청이라고 고친 뒤 그 해 겨울 그들의 요구에 미온적이었던 조선을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청군의 급격한 진격으로 왕자 등은 강화로 피난하고 인조와 세자는 황급하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였으나, 이듬해 정월에 한강변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과 사대의 관계를 맺어 조·명 간의 옛 관습에 따라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또 막대한 양의 세공을 바쳤다.
이러한 사행을 통하여 연경(燕京)에 가는 사신들은 중국문물을 접하고 서적을 구입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학술과 문물에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청대 학술의 전성기인 고종(高宗)의 건륭시대는 조선의 영조와 정조에 걸친 시기에 해당되며, 이 시기의 학문 발달에 미친 청대 학술의 영향은 매우 컸다. 종교에서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도 중국을 통해서였다.
19세기 말 일본은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강화도조약을 맺어 그들의 조선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한편, 러시아가 극동에서 남하정책을 꾀하고 있었으므로 청은 조선에 권고하여 〈조미수호조약〉을 맺게 함으로써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켰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의 간섭이 심해져 흥선대원군을 납치했으며, 군대를 훈련시켜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도 큰 몫을 해냈다. 이러한 간섭은 조선의 불만을 야기시켜 친러정책을 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뒤 1894년부터 1895년에 걸친 청일전쟁의 패배 결과 청은 조선에서 손을 떼고, 아울러 과거의 관계도 청산되어 조선은 형식상 독립국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청을 대신하여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 침략의 야욕을 구체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애국지사들은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대하여 중국인들은 상당히 동정적이었다.
1912년 신해혁명의 결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쑨원이 초대 임시대통령에 취임하자,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던 애국지사들은 쑨원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며, 쑨원도 깊은 관심과 동정을 표하였다.
또한, 1918년 11월 전후문제를 설명하고자 중국에 온 미국 윌슨(Wilson,T.W.)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rane,C.R.)과 만나 우리 대표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요구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도 파리강화회의 중국측 대표였던 왕정옌(王正延)과 류정샹(陸徵祥)이었다.
이처럼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인들, 특히 쑨원 중심의 광둥군 정부(廣東軍政府) 관계 인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19년 상해에 한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중국 혁명지도자들과 한국 독립운동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특히, 5·4운동을 계기로 조중항일연석회의(朝中抗日聯席會議)를 소집하고 중국측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고 성명하였다.
한국의 임시정부는 1921년 9월에 의정원(議政院)의 결의로 신규식(申圭植)을 전권사절로 임명하여 광저우(廣州)의 광둥호법정부(廣東護法政府)에 보냈다.
당시 비록 국제적으로 승인받지는 못했던 광둥호법정부였지만, 이 정부는 한국 임시정부를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1925년 광둥호법정부는 쑨원이 죽은 뒤 국민정부(國民政府)로 개조되어 북벌을 시작하였는데, 한국의 애국지사들도 참가하였다.
그런데 국민정부가 중국 국민당의 좌우파 분열로 정부마저 분열되자 한국 독립운동도 그 영향을 받아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개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1927년에는 조봉암(曺奉岩)·여운형(呂運亨)·홍남표(洪南杓) 등이 중국공산당 한인 지부를 결성하여 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중국공산당에 조직적으로 결부시켰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반일 감정이 확대되었고, 이와 함께 1932년 상해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일어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의 정당·군·민간단체에 관계된 인사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만주지역에서는 중국 의용군인 왕더린(王德林)·마찬산(馬占山) 등이 조선독립군과 연합하여 한중항일연군(韓中抗日聯軍)을 조직, 일본 관동군(關東軍)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7년에는 7·7사변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또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국민정부가 전면 항일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한국 독립 지원은 바로 그들의 항일전과 같은 것이어서, 어떠한 제한도 고려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김구(金九)·김약산(金若山)의 두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김구는 난징(南京)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光復陣線 혹은 光線으로 약칭)를 결성하였으며, 김약산 중심의 좌파단체들은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조선혁명자연맹의 세 단체를 소집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民線으로 약칭)을 성립시킨 뒤 연맹의 투쟁 강령인 중국항일전쟁에의 참가에 따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참여하여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한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필요하게 되자 국민정부는 1939년 김구와 김약산에게 좌우 양파인 ‘민선’과 ‘광선’을 연합하여 항일복국(抗日復國)을 결성하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한국 임시정부 안의 우익 3당(한독당·국민당·조선혁명당)의 요구 아래 한국광복군이 창설됨으로써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으로 개편하여 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켰다.
그러나 그 뒤 한국광복군은 한국 임시정부에 예속되어 임시정부의 주권이 크게 향상되었다. 직접 미군 사령부에 요구하여 그들의 연락조를 한국광복군에 파견시켜 주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심지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도 중국에 있는 한국광복군을 바탕으로 교섭하였다.
한편, 중국공산당의 지원 아래 있던 연안파(延安派)는 별도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는데, 그 배후에는 중국공산당과 8로군(八路軍)이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항일전에서 활동을 전개하여 그 세력이 확충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의 항일운동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투항이 너무 빨리 이루어지고, 종전 후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점령군 사령관 하지(Hodge,J.R.)가 한국광복군은 해산하고 귀국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르도록 요구하여 한국광복군은 해산된 채 귀국했으며, 조선의용군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함으로써 건국 이후의 국군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2) 대만과 한국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에 성립되자 대만으로 옮겨 온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는 현재까지 집권당으로 통치하고 있다. 외교에서는 본토 수복을 정치 구호로 삼고, 반공·친미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1971년 10월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자 국민정부는 탈퇴하였고, 1972년에는 일본의 중국 승인으로 대일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더욱이, 1979년 1월 중미 상호방위조약이 미국과 중국의 수교로 파기되는 등 국제적으로 고립 노선을 취하고 있다.
미국·일본과는 정식 국교는 없어졌으나 민간관계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즉, 미국과는 북미사무조정협의회(北美事務調整協議會)·미국재대만협회(美國在臺灣協會)를, 일본과는 동아관계협회(東亞關係協會)·일본교류협회(日本交流協會)를 각각 설치해 두고 활발한 경제·문화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 정치·외교적 상황하에서 한국과 대만은 1949년 수교가 이루어진 이래 1992년 8월까지 지속되어 왔다. 즉, 한국은 1949년 1월 중화민국과 단독 수교를 맺고 상호 상주 공관을 설치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대만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군 파견을 승인하였다.
그 뒤 두 나라는 1952년 3월 항공협정을 체결하였고, 1961년 3월에는 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65년 5월에는 문화협정을 체결하여 그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고 있다. 1949년 8월에는 장제스 총통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1966년 2월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하였다.
1990년 7월까지 대만이 아시아에서 수교를 맺은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단교함으로써 한국만 남게 되었다. 한국이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간섭을 받기 이전까지 한국과 대만은 홍콩·싱가포르와 더불어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이라고 불렸으며, 경제 발전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불리기까지는 두 나라 모두가 불행한 역사를 경험해 왔다. 지정학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두 나라는 일본의 강제통치를 거쳤고, 따라서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아직도 두 나라에 반일 감정이 많이 남아 있다.
광복 직후의 두 나라는 다른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같이 전형적인 농업국에 지나지 않았다. 산업별 취업인구가 60% 이하로 낮아진 것이 한국에서는 1965년(58.6%), 대만에서는 1955년(55.6%)이었다. 또, 다 같이 비산유국이며, 자원이 빈약하고 자본도 기술도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은 정부의 강력한 주도로 수출지향적 공업화전략을 추구하여 공업화 과정에서 해외 자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으며, 특히 자본재나 원자료의 수입 및 기술 도입은 주로 일본에 의존해 왔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나 경제개발전략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한국과 대만의 1989년 말 경제 규모를 비교해 보면, 국민총생산 규모에서 대만(1504억 달러)이 한국(2101억 달러)의 71%이나, 1인당 국민소득 규모에서는 대만(7,518달러)이 한국(4,968달러)의 151.3%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국력 증강을 우선한 부국정책을 표방하는 한국 경제와는 달리, 부민을 우선한 민생주의를 표방하는 대만 경제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1994년의 국민총생산량은 2441억 달러였고, 1인당 국민소득은 1만1604달러로 여전히 농·공업 병행 발전(수출주도형)을 기축으로 한 부민정책을 견지하고 있었다. 한편, 1994년의 총수출량은 931억 달러였으며, 수입은 854억 달러였다. 1995년 우리 나라의 대대만 수출은 39억 달러였고, 수입은 26억 달러였다.
대만과 한국은 국제정치면에서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두 나라는 아시아에서 반공국가의 쌍벽으로 제2차세계대전 후 그 자세를 굳게 지키고 있다. 각각 40만 명에서 6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안고 국가예산의 40% 정도를 방위비에 투입하고 있다.
1980년대 말까지 대만은 미국과 중국의 접근, 일본과 중국의 접근 등 자유 진영의 우방을 모두 잃었다. 따라서 1992년 7월 말까지 아시아에서는 단 한 나라, 한국만이 대만과 수교를 계속해 왔는데, 한국도 1992년 8월 24일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함에 따라 자연히 단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3년 11월 그 동안의 경제적·국제정치적인 공통점과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바탕으로, 형식적인 수교는 단절했지만 두 나라의 비상주 공관대표부를 설치함으로써 실질적인 관계는 여전히 잠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1995년 1월 우리 교민은 1,029명이었으며, 체류자도 1,584명이나 되었다.
(3) 중국과 우리 나라 ① 중국과 북한 : 중국과 북한의 외교 수립은 1949년 10월에 이루어졌으며, 1950년 10월 중국은 19개 군 57개 사단의 약 85만 명을 6·25전쟁에 참전시켰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 명분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脣亡齒寒 保家衛國〕 자기 안전 확보에 두었으나, 당시 소련에 대한 중국의 의존성과 중국에 대한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 6·25전쟁 참전을 자신의 정치권력 통합에 이용하려는 정치적 목적, 참전을 통한 스탈린(Stalin,I.V.)의 신임 획득 등 복합 원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1953년 7월의 비밀군사협정 체결을 통하여 중국과 북한관계는 혈맹관계로 발전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중소분쟁의 표면화, 중국의 문화혁명, 월남전 확대 등의 사건으로 인하여 상호 밀착과 소원관계가 반복되었으나, 기본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긴밀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의 외교정책이 기본적으로 양대진영론과 중간지대론 같은 진영론에 입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의 대남전략에 대한 적극 지원 확약과, 1971년 8월의 무상군사원조협약 체결 등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치·경제·군사 분야의 지원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여기에는 1970년대 마오쩌둥과 화궈펑(華國鋒)에 의해 추구되었던 적극적인 반소노선이 중국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지위를 크게 제고시켰기 때문이다.
1975년 4월 김일성(金日成)의 중국 방문과, 1978년 5월 화궈펑 및 같은 해 9월 덩샤오핑(鄧小平)의 북한 방문 등 최고 지도자들의 상호 방문으로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강화 되었고, 특히 중국은 북한의 통일노선을 지지함과 동시에 주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였으며, 두 개의 한국정책을 반대하였다.
그런데 1978년 말 중국의 제11기 3차 전국인민대표회의 이후 개혁실용주의노선과 대외개방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과거 중국 외교정책의 신축성을 크게 제한했던 진영론과 이데올로기에서 탈피, 다원화를 추구하는 독립자주외교노선을 채택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새로운 외교정책과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과거 대북한관계에 기초하여 형성되어 온 중국의 한반도정책에 점진적인 수정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1980년대 말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남북한 대화 및 관계 발전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처지가 북한의 처지와 일치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한반도정책이 대북한정책과 완전히 일치했던 과거의 일원화정책과는 달리 점차 이원화현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은 교차 승인이나 유엔 동시가입 문제는 한반도의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중국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했던 ‘1국가 2체제’방식에 의한 남북한 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1950년대 혁명과 이념적 일치성에 기반했던 북방 삼각협력체제가 중소분쟁으로 붕괴됨으로써 북방 삼각관계는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이변적 관계(二邊的關係)로 발전하였다. 중·소관계의 개선은 북방 삼각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1950년대와 같은 삼각협력체제로 발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 중소 대립의 악화는 중소의 북한에 대한 경쟁관계를 심화시킴으로써 북한에 대한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동시에 중소에 대한 북한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소련의 해체로 중소관계는 중러관계로 변화되어 한반도에 대한 중러의 행동반경을 제고시키게 되었고, 이는 중국과 북한,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 발전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② 중국과 한국 : 중국은 1949년 10월 대륙에 정권을 수립한 이후 양대진영론에 입각한 대소 일변도정책을 선포하고 반미(反美)를 외교의 기본 척도로 삼았기 때문에, 모든 친미 국가는 곧 적대 국가로 여겨 중국의 한반도정책은 중국의 북한정책에 의해 결정되었고, 한국과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단절되었다.
따라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중소분쟁의 표면화, 문화혁명, 월남전 확대 등으로 밀착과 소원관계가 반복되면서도 중국의 한국의 관계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1972년 12월 덩샤오핑이 정권을 장악하여 개혁·개방을 선언한 이후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기본 정책노선은 여러 측면에서 전개되어, 1973년 대공산권 문호개방을 위한 6·23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한국도 중국 접근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1974년 1월 〈한일대륙붕협정〉 체결을 비롯하여, 한중 간 어로분쟁 등과 관련한 비난을 전개하는 등 한국의 실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치·경제·군사 분야의 지원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두 나라 최고 지도자의 상호 방문으로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던 시기로, 남북한에 대한 기본 정책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1978년 말 중국의 제11기 3차 전국인민대표회의 이후 개혁실용주의노선과 대외개방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독립자주외교노선을 채택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2년 제12기 전국인민대표회의 후야오방(胡耀邦)의 정치 보고에서 중국이 우호국이 될 수 없는 국가군(國家群)에서 한국이 제외된 것은 바로 중국의 한국관에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한국관 및 인식의 변화는 과거 금기시해 왔던 한국과의 관계에서 신축성과 현실주의적인 정책 추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1983년 5월 중국인에 의한 중국민항기 납치로 한국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중국은 국제민항기구나 일본 등 제3국을 통한 간접적인 해결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중국 당국의 관계자를 파견하여 우리 나라 관계자와 직접 사태 수습을 위한 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두 나라간의 교섭 결과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중국 정권 성립 후 처음으로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중국 당국자에 의해 처음으로 호칭되고 문서화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기존 한국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의미함과 동시에 한중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중국은 간접 교역과 직접적인 인적·체육 교류의 확대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보다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부터 홍콩·일본 등 제3국을 통한 간접 교역이 시작된 이래 두 나라간의 교역은 크게 확대되어 왔다. 특히 이러한 간접 교역은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직접 교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하였으며,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여건들이 점차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
물질 유인·경쟁 개념과 시장경제이론 같은 자본주의경제방식의 적극 도입, 지방과 기업의 자주권 확대, 민법통칙과 기타 경제법규 등을 비롯한 경제체제 개혁의 적극화와 적극적인 개방정책은 중국 경제체제와 이질적인 체제를 갖는 서방의 대중국 진출에 유리한 환경요인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계가 없던 1991년까지 한국의 대중국 경제 진출에도 유리하게 작용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한국 기업과의 접촉을 통하여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문제를 거론하고 중국 내 자원개발, 건설사업의 참여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이에 따라 한·중국 경제협력관계는 더욱 발전함과 동시에, 1992년 8월 외교관계를 수립함에 따라 지금까지 추진되어 온 일련의 대중국 경제 진출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인적 교류면에서는 1983년 7월 친·인척 간의 상호 방문이 허용된 이래 한·중간에는 이산가족들의 초청 방문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 중국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에 한국 관리의 입국이 허용됨으로써 한국인의 중국 방문이 확대되어 갔으며, 중국인들의 한국 방문도 점차 증대되었다.
특히, 다른 어느 영역보다도 체육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어 1979년 6월 항저우(杭州)에서 개최된 세계배드민턴대회의 초청장을 보내는 등, 1970년대 말부터 적극적인 접근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84년에 쿤밍(昆明)에서 있었던 데이비스동부예선 테니스대회에 한국 대표단이 참석한 이후, 1984년 4월 광저우의 제11회 아시아축구연맹총회, 같은 해 10월 상해의 제10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및 1985년 4월에 항저우에서 개최된 제17회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 등에 한국 대표단이 참석하였으며, 중국측은 1984년 4월 제8회 아시아청소년농구선수권대회와 제2회 아시아수영선수권대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개최되는 각종 대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중국은 1984년 9월의 제3차 아시아올림픽위원회 총회에 공식 대표단을 파견하였으며, 특히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관계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였다.
그 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경기대회에도 중국은 750명의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하였으며,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되는 제11회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는 한국 대표단이 참가하였다.
결국 1992년 8월 정식 국교가 수립됨에 따라 체육 교류도 더욱 활발해지면서 모든 구기종목이 교차로 두 나라를 오가며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두 나라 인적 교류도 1987년에는 1,800명에 불과하던 것이 1988년에는 1만 명에 이르고, 1989년에는 약 2만3000명이 상호 방문함으로써 2년 만에 10배 이상의 상호 방문이 이루어졌고(〔표 1〕), 중국에 대한 투자도 꾸준한 급신장세를 보여 1997년에는 수출 1827억달러, 수입 1423억달러에 이르는 급성장을 보였다.
특히, 1990년 10월 20일 두 나라간에 일부 영사기능을 포함하는 무역대표부 설치를 합의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 이러한 간접 교역과 인적·체육 교류의 확대 등 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중국 간의 공식적이자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관계 발전에는 1991년까지 엄격한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북한과의 기존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얻고 있는 이익을 상쇄할 만한 중요한 이익이 한·중 간에 나타나지 않았던 정치적 역학관계는 두 나라 우호관계 증진 발전에 어려움을 가져왔고,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계속 두 나라 관계 발전의 주요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1972년 덩샤오핑의 등장에 따른 개방·개혁을 선언한 중국의 새로운 대외정책과 1980년대 초부터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과거 북한관계에 기초하여 형성되어 온 중국의 한반도정책에 수정을 가하게 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해체되기 시작한 소련의 러시아로의 변혁은 중·소관계의 냉전체제 해소로 중국의 외교정책에 폭을 넓혀 주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중국의 대미 정책도 소련의 해체로 미국이 대소 중심에서 대중국 중심으로 축을 옮기게 되자 차츰 그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대중국정책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이 택한 중국식의 개방과 중국의 독자노선을 미국이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중국은 한반도정책에서도 북한정책과 완전히 일치했던 과거의 일원화정책을 탈피하여 점차 다원화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다 경제 실용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한 중국은 한국의 경제 발전이라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1992년 8월에는 드디어 50여 년간 단절되었던 두 나라의 관계가 정상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는 1992년 8월 24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로 나타났고, 중국의 대외개방과 경제근대화정책으로 양국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고 경제교류는 급성장하고 있다.
1998년 현재 한·중 양국이 수교한 지 6주년이 되는 해다. 한·중 양국은 1992년 8월 수교후 6년여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방면에서 급속한 관계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특히, 양국은 함께 경제·통상 등 실질 협력관계를 증진시켜 옴으로써, 각 방면에서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양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은 그간의 한·중관계 발전에 따라 한국과의 협력을 더욱 중시하고 있으며, 개혁, 개방정책을 원만히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긴요한 만큼 4자회담 참여 등을 통해 건설적인 역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우리로서도 중국과의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우리 나라는 한·중 양국이 21세기에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확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바람직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양국은 지리적 근접성, 문화적 유사성, 경제구조의 상호보완성 등을 바탕으로 협력관계를 계속 확대, 발전시켜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한·중 양국 관계는 수교이후 경제분야 위주의 실질 우호협력 증진에 중점을 두고 발전해 왔으나, 1998년도에는 정무분야를 포함한 포괄적 협력 확대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해였다.
양국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 유지 및 역내 경제·안보 분야 협력을 위해 4자회담은 물론 UN 및 APEC, ASEM 등 국제무대에서의 협력관계를 강화해왔으며, 특히 1998년 11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 국빈 방중 시 ‘21세기의 한·중 협력동반자관계’구축을 규정한 한·중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형사사법공조조약, 복수사증협정, 청소년 교류 양해각서, 철도분야 교류협력약정 등에 서명함으로써 정치·경제·문화 등 제반분야에서 포괄적인 협력기반을 마련하였다.
1998년에는 양국간 정부 고위인사 교류도 활성화되었던 바, 11월 김대중대통령과 쟝쩌민(江潭民) 중국 국가주석간 정상회담 및 4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2차 ASEM 정상회의 계기의 김대중 대통령과 주룽지(朱鎔基) 중국총리간 회담 등 정상급 교류는 물론, 7월 외교통상부장관 공식 방중 등 4차례의 한·중 외무장관회담(4월 ASEM 외무장관회의, 9월 UN 총회, 11월 대통령 국빈방중 계기)이 개최되었다.
양국 정부간 관련부처에서도 상호 고위인사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어 감사원장과 정보통신부장관, 문화관광부장관 등의 방중 및 중국 대외무역합작부 부부장 등의 방한이 있었다.
양국 의회 및 정당간 교류도 활성화되었던 바, 2월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명예총재, 5월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대표단, 11월 김용환(金龍煥) 의원 등 자민련 대표단, 12월 양성철 의원 등 새정치국민회의 대표단 등이 방중하였고, 3월 리청런(李成仁)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 후찐타오(胡錦濤) 국가부주석 겸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등이 방한하였다. 한·중간의 정책협의회도 빈번히 개최되어, 양국간의 주요 현안들에 있어서 상호 입장차이를 좁히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서해에서의 어업질서의 조속한 확립을 위한 양국간 어업회담이 타결되어 한·중 어업협정이 11월 가서명되었고, 배타적 경제수역(Exclusive Economic Zone:EEZ) 경계획정회담도 열렸다.
그외에 한·중 외교부 정책기획협의회와 영사국장회의, 문화공동위원회 등이 개최되었으며, 특히 중국이 해외여행 자유화 대상지역에 한국을 포함시키는 조치가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1998년도 대중국 교역액은 184억 달러(수출 119억 달러, 수입 65억 달러)로 양국은 상호 각각 3번째(미국, 일본 다음) 교역 대상국이 되었다. 대중국 투자 역시 활발히 진행되어서 실제 투자 기준으로 40억 달러에 달해 중국은 우리의 제2의(미국 다음) 투자대상국이 되었으며, 특히 건설부문에 있어서 중국은 우리의 최대 시장으로 부상하였다.
우리의 최대 무역흑자 지역인 홍콩과의 실질관계도 주권반환 전과 다름없이 계속 증진되고 있는 바, 한·홍콩 양측간 1998년도 교역이 98억 달러(우리 무역흑자 87억 달러)에 달하였으며, 인적교류도 급증, 1998년에 35만명(방홍 12만7000명, 방한 22만4000명)에 달했다. 이로써 홍콩을 포함한 중국이 우리의 최대 무역흑자 국가로 급부상하였다.
또한, 한·중 양국간에 자동차, 고화질 텔레비젼, 전자교환기 분야 등 산업분야 협력의 진일보 발전을 위한 일련의 교섭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1994년 6월 한·중 환경협력공동위가 서울에서 개최된 이래 황해오염 방지 및 산성비에 대처하기 위한 환경분야 협력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협력체제는 한·중 무역실무회의, 경제공동위원회·환경공동위원회 등 경제협력을 위한 각종 협의체제들이 정기화되면서 더욱 확대, 심화되고 있다.
한편, 각종 학술, 예술 교류 등 문화협력도 다양하게 전개되어 양국 국민간의 상호이해와 우의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99년 9월 양국의 저명한 학자가 참가하는 제5차 한·중 미래포럼이 상하이에서 개최되어 21세기에 한·중관계의 바람직한 발전에 관하여 심도있는 논의를 한 바 있으며, 11월에는 상하이 사회과학원과 우리 외교안보연구원간 세미나가 상하이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한·중간 급속한 관계발전에 힘입어 양국간 인적교류도 급증하고 있다. 1998년도 한·중 인적교류는 우리측 기준으로 57만7000명(아국인 방중 48만7000명, 중국인 방한 9만명)으로 수교 당시 9만명에 비해 6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중국에는 1998년 말 현재 1,500여개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3만5000명 이상의 교민이 장기체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민보호 및 중국 진출 우리 기업들의 원활한 지원을 위한 총영사관 추가개설 등 효율적인 공관 지원체제를 계속 정비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한·중 양국은 경제적·지리적·문화적 제반요인을 고려할 때, 앞으로도 양국간 우호렵력 증진은 계속 발전되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양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동북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와 안정 유지에도 긴요하다는 공통인식을 견지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공동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한·중 양국은 상호 체제가 다르고, 이에 따른 법과 제도의 차이, 국민간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들이 양국관계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될 수 있는 바, 이를 원만히 극복해 나가기 위한 지속적인 공동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과학·기술협력협정(1992.10.), 무역협정(1992.10.), 경제·무역 및 기술협력공동위설립협정(1992.10.), 투자보장협정(1992.12.), 해상운송협정(1993.6.), 우편·전기통신분야협정(1993.8.), 환경협력협정(1993.11.), 문화협정(1994.4.), 산업협력위 설치협정(1994.6.), 한국기상청·중국기상국간 서울·북경간 기상통신회선 설치협정(1994.7.), 이중과세방지협정(1994.9.), 항공협정(1994.10.), 원자력협정(1995.2.), 세관협력협정(1995.4.) 등 두 나라간 주요 협정이 단기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과거 경제교류면에서도 두 나라간 왕복 교역 총액이 1988년에는 30억 달러였고, 1989년에는 31억 달러에 이르러, 중국은 우리의 주요 무역상대국으로 부상하였다(〔표 2〕).
그 뒤 1992년 국교가 수립되면서 교역량은 꾸준히 늘어 1994년 대중국 수출은 62억298만6000달러이고, 수입은 54억6284만9000달러였으며, 1년 뒤인 1995년에는 대중국 수출이 91억4358만8000달러이고, 수입은 74억119만6000달러로 1년 사이에 총교역량은 무려 140%로 늘어났다. 그리고 국교 수립 이전인 1989년에 비해 5배 가까운 성장세를 나타내게 되었다.
대중국 수출품목은 플라스틱·원자로·보일러기계·전기기기·유기화학품 등이고, 수입품목은 철강·광물연료 등이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안의 우리 문화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던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에 특수하고 복잡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시대마다 국경선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국가 형성기에서부터 고구려시대까지 지금의 만주 일대는 얼마간의 성함과 쇠함이 있었지만 우리의 영토였으며, 가장 많이 확장될 때는 화북지방까지 넓혀진 적도 있다.
남북국시대인 발해 때도 다소 축소는 되었지만 역시 만주 동북부는 우리의 영토가 분명한 우리의 옛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뒤 우리 민족과 친연관계가 있는 요·금 등 동북방 민족이 우리의 옛 영토를 점령하였고, 명·청이 번갈아 지배하게 되어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이 지역에서 사실상 주권이 박탈당한 상태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피가 면면히 이어져 왔고 다시 근세의 이민으로 전체 인구의 상당수를 우리 민족이 차지하고 있으며, 옛 민족유산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현재 중국 동북부 일대는 한국 민족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우리 나라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으므로 가장 밀접하게 문화교류가 이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역대에 걸쳐 공식 사절의 내왕은 물론, 승려·상인의 교류와 함께 수시로 대규모의 이민도 있어서 중국 본토와의 교류도 매우 활발하였다.
따라서 중국 본토에 남아 있는 우리의 문화유적이나 유물도 상당수에 이르며, 간접적인 자료도 흔한 편이라고 하겠다. 또한, 중국 정사인 ≪이십오사 二十五史≫에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기록은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1) 선사시대 우리 나라와 중국과의 교류는 구석기시대부터 있어 왔겠지만 민족교류의 실상은 거의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원전 6000년경 전후부터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는 직접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중국 쪽에서는 전 극동지역이 비슷한 신석기문화라고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지만, 만주 일대나 현재의 우리 나라를 포함한 각지의 신석기문화는 중국 황하 유역인 이른바 중원(中原)과는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상호간에 유사점이 많아 어느 정도의 교류관계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 일대의 신석기문화는 우리 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다. 가령, 심양(瀋陽)의 신락문화(新樂文化)나 요령성(遼寧省)의 우하량유지, 객좌현 동산취문화(東山嘴文化) 등의 만주 일대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 신석기문화 등과 관련하여 고조선(古朝鮮, 檀君朝鮮)문화와의 관계를 신중히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단군조선은 만주에서 우리 나라 북부에 걸쳐 존재했던 우리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반영하는 선국가형태였다고 생각되므로,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원의 신석기시대 문화인 용산 문화(龍山文化) 등도 우리 나라 신석기문화와 어느 정도 교류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흑도의 유사성 등에서 이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2000년경에서부터 1000년경 사이에 시베리아 내지 만주 일대에서부터 우리 나라에 걸쳐 동일한 청동기 문화가 존재한다. 신석기시대의 유문토기가 아닌 무문토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이들은 주로 구릉지대에서 농기구와 함께 나오고 있어 농경사회로 여겨지고 있는 문화이다.
묘제는 지석묘와 석관묘인데, 무문토기와 함께 중국의 중원지역에는 보이지 않는 특징적인 무덤형식이다. 여기에서는 마제석검과 더불어 세형동검(細形銅劍)이 반출되고 있는데, 세형동검은 이보다 선행하는 비파형동검(만주식 동검)에서 계승,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문화 유적은 몽고·만주·한국·시베리아, 멀리 유럽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우리 청동기문화와 가장 깊이 관련되고 있는 지역은 북으로 내몽고의 적봉(赤峯) 하가점, 동으로 만주의 길림, 송화강 일대, 서로는 요서(遼西)에 이르고 있다.
특히 길림의 소달구, 내몽고의 하가점, 요령의 조양 12대영자 등 수많은 문화층은 그 좋은 예이며, 요령 객좌현 북동의 청동기문화층도 이 같은 예에 속할 가능성이 짙다.
이 지역은 우리 나라의 북부지역과 함께 기자조선의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자조선의 실체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만주와 우리 나라 북부지역에 세력을 떨친 지배적인 국가형태가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므로, 이 지역의 당시 국가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기자조선으로 불릴 수 있는 이 지역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민족은 신석기시대의 고아시아족이 아니라 예맥족(濊貊族)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예맥족만 거주했다고는 보지 않으며, 선주민을 비롯해서 여러 민족이 혼재하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청동기문화의 담당 계층인 지배 민족은 예맥족으로 보는 견해에 일단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이 예맥족은 농경문화인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기자조선이라는 국가 형태를 건설하여 고대 문명을 꽃피웠을 것이다. 우리는 만주 일대에 분포해 있는 청동기문화 유적에서 이런 사례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청동기문화를 계승한 이 지역의 철기문화도 우리 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는데, 그것은 위만조선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2) 진한시대(秦漢時代) 진한시대가 되면 우리 나라와 중국과는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며, 우리의 옛 땅인 만주 일대와 북부지역 일부에서는 중국측의 팽창정책에 따라 심각한 각축전이 벌어지게 된다.
특히, 한나라는 무제 때부터 흉노를 정벌하여 서역까지 복속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나라를 침략하였다. 당시 막강하게 세력을 떨치던 위만조선을 패망시켜 이 지역의 일부를 일시 점거하여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로 삼게 된 것이다.
현재 위만조선의 분명한 유적지나 유물은 밝혀져 있지 않고, 한사군도 변천이 심해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편이다. 그러나 중국 문화는 한의 동방 진출에 따라 우리 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사군의 낙랑을 비롯한 식민지에는 직접적인 한문화가 남게 되었고, 우리 나라 남부에까지 한의 문화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것이다. 그러나 이 한사군을 통하여 우리의 문화가 중국으로 전파되기도 한 사실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3) 위진남북조·수당시대(魏晉南北朝·隋唐時代)와 삼국시대 이 시대부터 우리 나라와 중국과의 사이에 본격적인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두 나라에 다 같이 획기적인 영향을 끼친 불교문화를 통하여 적극적인 교류가 전개되었다.
이와 함께 부여와 삼국, 특히 고구려는 만주 일대에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북아시아의 강자이자 독특한 문화국을 이룩하였으므로, 전 만주 내지 북중국에 걸쳐 이들의 유적·유물이 무수히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산둥반도 일대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므로, 이 일대에도 백제 문화의 흔적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 일대에 우리 문화의 발자취를 분명하게 남긴 나라는 고구려이다. 고구려 문화는 국내성이나 요동성 같은 도시적인 성곽이나 이들 성을 중심으로 한 사원지(寺院址)와 불교미술들, 그리고 무덤과 무덤 벽화 등에 잘 남아 있다.
만주 일대의 고구려 옛 영토에는 수많은 성들이 있었다. 성은 당시의 지방 중심이자 도시였으며, 방어진지를 겸하고 있는 군사도시였으므로 문화의 집산지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모든 문화는 이러한 성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국도(國都) 서울은 나라의 중심지로 최대의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첫 번째 수도는 졸본(卒本)이었으나, 제2대 유리왕 22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였다. 현재의 집안 통구지역에 해당되는 곳인데 국내성과 환도(丸都, 일명 산성자)산성 등 두 성이 있다. 이 두 성이 약간의 이동은 있었겠지만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장기간에 걸쳐 고구려의 수도 구실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국내성에는 역대에 걸친 고구려 문화 유적이 산재하고 있으며, 이 지역 일대에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 고구려의 국력을 상징하던 요동성과 안시성, 백암성(白巖城)과 신성(新城), 용성(龍城:지금의 朝陽)과 숙군성(宿軍城), 부여성과 남소성 등은 강대한 고구려의 국력과 광활한 국토를 단적으로 알려 주는 성곽 도시들이다. 이 가운데 요동성과 안시성 등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동성에는 육왕탑(育王塔)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 사원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듯이, 중국 문화를 수용하던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더러 광개토대왕이 직접 친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국방의 요충지로, 수·당의 침략 때 최선의 방어를 한 유명한 국방도시였다. 안시성 역시 당군의 침략 때 선전분투해서 대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명한 도시였다.
이러한 성곽 도시들은 오늘날 대부분 폐허로 변하여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있는 예도 많으며, 남아 있는 경우도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 형편이다.
앞으로 이러한 고구려 성곽 유적들은 치밀한 발굴에 의해 그 전모를 드러내야 할 것이며, 이러한 발굴은 우리 나라 조사단과 합작으로 이루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환도산성, 이른바 산성자산성은 현재 7㎞에 달하는 거대한 석축성곽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광대했던 성곽 규모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국내성은 집안 시가지 주위에서 발굴되었는데, 거대한 석축성곽이 나타나 당시의 규모를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유물이나 기타 도시 유적에 대해서는 좀더 상세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곽과 함께 고구려의 무덤〔古墳〕과 비석도 만주 전 지역에 걸쳐 산재해 있지만, 국내성 일대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국내성 부근에 있는 장군총(將軍塚)과 대왕총(大王塚)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비 동북쪽에 축조된 거대한 무덤인데, 7층 5단씩 쌓은 석축무덤이다. 피라미드처럼 생겼다고 하여 피라미드형이라 불리는 이 석축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마야의 석축제단 등과 함께 석축문화의 장관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석축무덤은 서울 방이동 일대와 충주지방에까지 전파된 독특한 고식무덤이어서, 우리 문화의 유적으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이 장군총과 인접한 곳에 있는 광개토대왕석비는 장군총과 함께 고구려의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고 있는 석조문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높이 6m의 우람한 자연석에 새겨진 이 비석에는 1,775자 정도 되는 광개토대왕의 생애에 얽힌 갖가지 사건이 잘 정리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의 생애는 결코 단순한 개인의 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곧 고구려의 발전사이며, 나아가 우리 나라의 흥륭사여서, 이 비석은 우리 나라 역사 발전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삼국간의 역사는 물론 북중국과 만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바다 건너 일본의 정세까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실로 중대한 사료인 셈이다.
더구나 일본인들은 여기에 적힌 글자를 변조 또는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여 일본 중심적인 이해를 하는 데 급급한 편이다. 그들은 몇 자의 단문에 집착하여 역사왜곡도 서슴지 않고 있으며, 이것은 중국인들의 이해와도 어느 정도 맞아 그 기세가 더욱 확산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우리 학자들의 대응도 활발하지만, 앞으로 좀더 신중하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우리 손으로 바른 해석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고구려의 벽화고분들과 기타 고분군들이 집안을 중심으로 수없이 산재해 있다. 집안에 있는 고분만 하더라도 1만 기(基) 이상이며, 전 만주 일대에 걸쳐서는 10만 기 이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안 일대의 벽화고분만 하더라도 모두 19기가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존의 고분벽화 무덤으로는 귀갑무덤이나 씨름무덤, 무용무덤이나 사신무덤 같은 것이 유명하다.
귀갑무덤은 단실형의 무덤으로 주인공의 실내생활도가 왼쪽 벽에 그려진 일종의 인물 풍속도 그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 무덤은 귀갑무늬가 특징 있게 표현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산연화무덤이 있는데, 연꽃무늬가 산화(散花)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장식무늬가 그려진 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무덤은 만포진 대안에 있는 환문무덤인데, 각 벽면에 20여 개의 동일한 둥근 무늬가 그려진 것이다.
씨름무덤은 우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무용무덤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현실(玄室)과 전실(前室)로 구성된 쌍실무덤인데, 현실 정벽〔北〕에는 주인공과 2인의 부인이 있고, 주위로 시종들이 시립하고 있는 생활풍속도가 있다. 동벽에 있는 풍속도가 이 무덤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중앙에는 새가 앉아 있는 성스러운 나무, 왼쪽에 부엌, 오른쪽에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 재미있는 풍속도이다.
무용무덤은 외형은 씨름무덤과 흡사하지만, 내부는 현실·통로·전실·연도가 연속적으로 배치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벽화는 전실에서부터 현실까지 전면적으로 그려진 것인데, 정벽〔北東〕, 오른쪽 벽〔北西〕, 왼쪽 벽〔南東〕에 걸쳐 연회장면이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북벽에는 장막이 드리워진 방에 주인공과 부인이 승려에게 공양하고 있으며, 각 상마다 음식물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져 있고, 오른쪽 벽에는 소달구지를 탄 2인의 승려와 사냥 장면, 왼쪽 벽에는 기마인물상과 춤추는 무희들이, 천장에는 일월성신들이 무덤을 장식하고 있다.
사신무덤〔通溝四神塚〕은 네모 부채꼴의 단실 무덤형식인데 주벽에 사신도가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고, 배경은 비운문(飛雲文)으로 가득 메우고 있다.
이들 외에 새로 발굴, 조사된 벽화무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장천1호무덤이다. 무덤은 집안 동북 45㎞에 위치한 분지에 있다. 남쪽으로 압록강에 면해 있고, 세 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분지에는 강가 작은 구릉상에 120여 기의 적석무덤과 봉토무덤군이 있는데, 구릉 위의 제일 높은 곳에 가장 거대한 봉분이 바로 장천1호무덤이다.
벽화는 전실·현실의 4벽·연도·천장·석문 정면·관 위에까지 묘사되고 있어서 현란한 채색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현실 남벽에는 무덤 주인공 부부와 가무공연 장면이 그려져 있고, 동벽에는 높은 수미대좌 위에 앉은 불상과 부처에게 예배하는 주인공 부부, 두 권속, 그리고 비천과 연화생(蓮花生)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불교의 실상과 불상의 수용 및 특징을 가장 생생하게 알려 주는 확실한 예로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이러한 벽화고분들은 수많은 고분군 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들 전체 무덤도 크게 주목되고 있으며, 이들 무덤들이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졸본 옛터로 알려진 환인(桓仁)지방에서도 현재 750여 기의 적석무덤들이 발견되었고, 고력자촌 적석대묘 등 44기 이상이 발굴되었는데, 유물은 철제품과 은제품들이 대부분이다.
두 번째 수도 국내지방에서도 1만 기 이상의 고분군이 조사되었는데, 집중적으로 분포된 곳은 우산하고분군·산성하고분군·만보정고분군·칠성산고분군·마선구고분군·하해방고분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발굴된 고분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산하68호분에서는 향토〔鼎〕·시루〔甑〕·솥〔釜〕·대야〔洗〕 등 4점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중국 서진시대의 것과 연관이 있는 세련된 작품들이다.
우산하3319호무덤에서 발견된 ‘丁巳(정사)’ 명(銘) 수막새 기와와 인물 상반신 화상석 등도 주목되며, 우산하1080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장신구들과 당시의 문화상을 연관시켜 보면 흥미를 끌게 된다. 산성하159호와 152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혁대금구(金具)도 무늬와 형태에서 주목된다.
만보정1078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마구, 특히 말안장 4점은 신라나 가야 지방 말안장과 연관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칠성산1196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말안장과 청동기들도 고구려 문화의 실상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작품들이며, 삼국과 중국과의 교류관계를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밖에 국내성과 요동성 등지에는 많은 사지들이 남아 있겠지만, 현재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전모를 밝힐 수는 없다.
백제도 산둥반도 일대에까지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백제 문화의 흔적이 중국 땅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점은 앞으로 치밀한 연구와 발굴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백제는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사절과 승려를 통하여 전파된 백제 문화의 자취를 찾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는 중국과의 교류가 삼국에서 제일 늦었지만 한강 유역을 확보한 6세기 중엽부터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신라 때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절이 중국에 건너갔고, 승려들도 수없이 내왕하였다. 원광(圓光)과 자장(慈藏) 등은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이 수도했던 여러 절에는 그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을 테지만 현재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는 중국 전역에 신라 문화의 발자취가 보다 짙어진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이 그들의 문화를 이역만리에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천룡산석굴(天龍山石窟)이 크게 주목을 끈다. 이 석굴은 백제의 명장이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딸 흑치씨와 고구려 유장 순(珣) 부부에 의해 조성되었던 것인데, 우리 유민에 의해 조성되었기 때문에 얼마간은 우리 나라의 조형 의지가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 불상들은 중국 당나라 최고의 사실조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주목된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제패했던 고구려의 유장 고선지(高仙芝)도 고구려 문화의 발자취를 어느 정도 남겼을 것이며, 고구려적인 기질을 은연중에 서역과 인도에까지 심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예에서 보다시피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중원과 일부 중국 일대에 걸쳐 그들의 문화를 남긴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 구체적인 발자취는 앞으로 좀더 검토,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 때는 신라 문화가 중국 문화에 더욱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산둥 적산 일대와 양쯔강 일대에 신라의 교포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산의 신라방은 대표적인 신라 거류민들의 거류지였고, 여기에 있던 법화사(法華寺)는 신라 문화의 중국 쪽 전진기지였다고 할 수 있다. 절에서 행해지던 의식과 생활습관, 즉 사찰의 의식주생활은 물론 예배대상인 불상과 불화까지도 신라식이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기행문에서 어느 정도 그 내용이 밝혀져 있지만, 거류지 신라방의 문화 또한 신라 문화를 그대로 이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張保皐)의 해상을 통한 무역활동도 단단히 한몫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천룡산 석굴 조성과 비슷한 경우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국의 가장 유명한 석굴사원인 용문석굴 가운데 ‘신라석굴’이라는 석굴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신라의 승려가 조성했던 것으로 생각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