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바흐
[스크랩] 한일 공존이 불가능한 이유 (펌)
kongbak
2007. 1. 16. 23:24
번호: 11093 글쓴이: 부여
조회: 14 날짜: 2005/04/25 20:06
올해로 81세를 맞이한 재일 동포 통일운동가인 정경모 선생의 인터뷰를 읽어봤더니 그 내용을 혼자보기가 너무 아까워서 보다 많은 분들이 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올립니다. 가쯔라-태프트 밀약을 비롯하여 일본 보수의 우경화 및 군국주의의 본질과 미일 동맹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정경모 선생의 탁월한 견해와 해박한 지식을 구체적으로 접하고 나니 정말 섬뜩하군요. 하여튼, 세상 보는 안목을 보다 넓게 해 줄 수 있는 멋진 글입니다.
(본문은 읽기 편하게 약간 조정하여 편집했습니다. 이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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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씨는 "20세기 초부터 지속되어 온 일본과 미국과의 커넥션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면서 "한국사람들은 정보면에서 부족하고, 또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감정만으로 일본을 적대시하는데, 이러면 오래되지 않은 장래에 또 큰일 당한다"며 일본에 경계심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한국의 정보기관조차 파악하고 있을지 의문이라는, 일 방위청 군사작전 '미쓰야(三矢)작전'과 패전 이후 1급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이 가지는 연관성, 60년 '안보투쟁'의 암초를 만나 일시 퇴장한 것 처럼 보였던 일본내 친미 우익의 생명력 등에 대해 선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쏟아냈다.
그러나 선생은 은연중에 한국정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특히 "나라고 왜 고향땅에 안 가보고 싶겠나..."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에서 선생의 짙은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선생께 마지막 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기자는 솔직히 망명객 생활에 대한 한스러움이나 과거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정 선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현대사 공부를 더 많이 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까만색 글씨는 기자의 질문, 파란색 글씨는 정경모 선생의 답변)
-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의 현대사, 특히 6.25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는 필독서로 꼽히기도 합니다만, 직접 번역을 해 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제가 처음 그 책을 접하고 놀란 것은 이 양반이 너무나 정확하게 해방당시 한국사회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총체적 사고라고 할까요? 지금 한국 미국 가릴 것없이 거의 모든 일반인들이 1950년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새벽에 총을 한방 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라구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커밍스의 관점은 그게 아니예요."
-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커밍스는 미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한 1945년 9월 8일부터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이지요. 아까 말한 두 명의 한국인 두 사람이 사살당한 날. <한국전쟁의 기원>은 1945년부터 다루기 시작해 1947년에 끝이 납니다. 미군의 마지막 부대가 철수한 날이 1948년 6월이고, 실제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인데, 이 책은 1947년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후는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가게 돼 있다고 판단한 셈이지요. 말 그대로 '기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 일본은 어떻습니까? 일본정부는 1차 6자회담은 물론 2차에서도 줄곧 북한핵 문제상관없는 자국민 납치문제 상정만을 외치고 있어서 각국으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는데요.
"핀잔 들을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일제가 조선 점령 시절 240만명의 노동자를 강제로 연행을 했어요. 게다가 한국의 윤정옥 교수(전 정대협 대표)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만 10만명 끌어다가 종군위안부로 했다 는 사실입니다. 이걸 중국, 미국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자국민 5명 납치된 '사실'을 자꾸 상정해달라고 하니 짜증나는 거지요. 6자회담이라는 게 원래 미국이 일부러 중국하고 러시아를 끌어 들인건데, 그들만 키워주는 꼴이 되어서 답답해 죽겠는데, 옆에서 일본이 자꾸 북한핵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네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복장이 터지겠습니까? 난 이 사람들이 정말 상식이 있는지 없는지 의문이 갈 때가 있어요. 자기네들이 한 범죄와 잘못은 전혀 뉘우치지도 않은채 자꾸 지네 고집만 피우고 있으니…."
- 그런데 일본은 왜 자꾸 그런식으로 나올까요? 이번에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과 더불어 계속 일본인 납치 문제를 들고 나오는 이유가 역시 자위대의 보통 군대화와 평화헌법 9조의 개정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일본의 우경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사람이 고이즈미 총리이고, 그 고이즈미 내각의 넘버2가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들어봤겠지만, 아베 신조의 조부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인데 이 사람은 1급 전범이예요.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군에 붙들려서 1급전범으로 처형된 사람이 도죠 히데끼를 포함해서 총 7명입니다. 그 처형된 날짜가 1948년 12월 23일입니다. 그런데 도죠나 기시나 다 1급전범이고 기시도 당연히 23일날 처형되었으야 하는건데, 그 다음날인 24일 기시는 무죄 석방이 되었고 나중에 총리까지 했지요."
-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 특히 주모자들은 종전 당시 연합군에 의해 처형 당해 야스쿠니신사에 위패가 봉안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입니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무튼 그때 관방장관이 사토 에이사쿠입니다. 당시 점령군이었던 미군정의 대변인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입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미군은 언젠가는 일본땅을 떠야 합니다. 그런데 소련과 이데올로기 문제로 대립하는 시기가 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신의 방패막을 설정해 놓아야하는데, 그 방패막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일본과 한국이었습니다."
- 정리를 하자면, 당시 미 점령군이 소련과의 대립구조를 생각하여 일본과 한국에 친미파 정권을 세워야겠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시 노부스케는 상당히 이용가치가 많았어요. 그렇다면 자기에게 대든 1급 전범인 기시에게 미국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인데, 그건 기시의 과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범으로, 그리고 전후 경제부흥을 일으킨 총리로서 기시 노부스케를 알고 있지만, 이 사람이 1930년대 만주국의 수반이었다는 사실은 눈여겨 봐야할 대목입니다."
- 만주국이라면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한 일본의 대륙진출 전진기지로 설치된 괴뢰국을 말하는 거죠?
"네. 만주괴뢰국. 그게 생기면서 기시가 그곳을 관리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그곳의 경제발전에 굉장한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만주가 당시에는 소련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시는 소련과 대립하면서 할 거 다 했지요. 그리고 당시 미 점령군의 대변인이었던 사토 에이사쿠의 말도 있고. 이것저것 조사해 보니까 기시가 가장 신뢰감이 간다는 것이지요.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라고 들어봤나요?"
- 20세기 초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가쓰라 타로와 루스벨트 미 통령의 특사였던 태프트 국방장관 사이에서 진행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켜 준 밀약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1905년 7월, 그러니까 포츠머스 조약이 나오기 두 달 전에 한 협잡인데, 내용은 필리핀과 한반도를 바꿔치기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미영일 3국동맹도 들어가지만, 요점은 필리핀은 미국이,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하자는 것 이지요. 그런데 1905년 11월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성립되었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빨리 순식간에 가능했냐면, 그리고 그렇게 당당하게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그러는 게 가능했냐면, 그 뒤에 미국과 맺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일본과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공존공생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지요. 조지 캐넌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습니까?"
- 미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 전문가로 알고 있습니다.
"조지 캐넌 은 1940년대에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최초로 입안한 사람 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100살이 넘었는데, 지금도 살아있지요. 흔히 '캐넌 구상'이라고 불리는 이 내용 중에는 '조선반도의 봉쇄정책' 이라는 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거 아는 사람이 한국 내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미 국방부의 비밀문서를 보고 저한테 알려준 것이니까요. 아무튼 그 내용은 조선반도를 타고 내려오는 소련 세력을 미 정부가 어떻게 하면 막을 수가 있겠는가에 대한 대책인데, 사실 별거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서운 구상이기도 하지요.
왜 무섭냐면, 바로 '가쓰라-태프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주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구식민지였던 곳, 그러니까 한반도와 만주 등을 일본의 재지배에 맡겨야 한반도를 타고 내려오는 소련 세력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캐넌 구상'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걸 트루먼이 받아들였죠. 이런 얘기는 조선이 막 해방되고 난 직후, 그러니까 한국전쟁 전에 나온 얘기들입니다."
- 무섭군요. 정리를 하자면 1945년 이후 미군이 조선에 들어올 때, 이미 저런 구상이 서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래요. 그래서 내가 제일 처음 말한 미 군정의 하지가 지휘한 24군단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2명의 건국준비위원회 사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에 관한 글도 써보고 싶다는 것도 다 이런 맥락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아까 말한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을 봐야 됩니다. 기시가 태평양전쟁 후 전범이 되어서 스가모형무소에 잡혀 있었을 때, OSS(미 CIA의 전신) 요원들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렸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 그렇다면 '1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가 석방된 건 미국의 전략때문이군요.
"정리를 하자면 이런 겁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재탕인 '캐넌 구상'을 트루먼 대통령은 전폭적으로 지지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일본에 의한 '구식민지(만주, 한반도)의 재지배'로 축약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일본에 있는 사람들 중에 소련과 대립하면서 식민지 지배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친미 우익이 누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전후 피폐한 일본의 경제를 살릴 능력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왕이면 자기네들의 대변인인 사토 에이사쿠하고도 연관이 있으면 좋습니다. 그런 조건에 들어맞는 유일무이한 사람이 딱 한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시 노부스케는 옥중에 있을 때부터 자신이 미국의 강력한 지지하에서 총리가 될 것도, 그리고 조선에서 큰 전쟁이 일어날 것도 알고 있었어요. 주위 측근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요. 한반도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러면 조선에 미국이 들어가 점령할 것이고 그러면 그 지배권은 자신들 일본이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 말씀을 듣다 보니,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시작하여 캐넌 구상,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초중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사회 움직임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내가 그런 사실을 옛날부터 계속 말해왔으니까 망명객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친미파나 친일파 세력이 권력을 쥐고 있었던 이승만 정권과 군사독재 정권의 눈엣가시였겠지요. 솔직한 말로 미국하고 일본에 꼼짝 못하는게 우리나라 아닌가요? 그나마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한국의 어느 다방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생각해 봐요. 아마 지금도 정보기관에서 누군가 오지 않을까 싶은데…."
-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물론 부족하긴 하지만요. 공개적으로 친일인명사전도 만드는 시대이고, 또 그런 것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도 좋습니다. 지난 1997년의 정권 교체 이후 한국도 꽤나 민주화가 진전되었거든요.
"하긴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도 되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기시 노부스케가 풀려 나오고 그가 예언한 대로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엔 분단상태로 휴전에 들어가 버렸어요. 미국이 예상한 캐넌 구상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런데 미 정부가 이걸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미소 냉전시대로 돌입하면서 여전히 유의미한 구상으로 남게 되지요. 그리고 기시 노부스케는 1958년 일본수상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 기록에 보면, 기시 노부스케는 1962년에 그만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4년간 총리를 했다는 것인데요.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기엔 너무 짧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실제 미국이 만든 법안인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해야 된다는 말도 계속하는 등 미국과 대립하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만.
"1960년에 한국에 뭐가 있었지요?"
- 1960년이라면, 4·19 혁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4·19 혁명. 당시 일본에도 비슷한게 있었습니다. 일본의 학생·노동 운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안보투쟁'이라는 것인데, 그 때 수십 만명이 모여서 지금 나가타쵸의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했었어요. 60년 6월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 '안보투쟁'이 무엇이냐면 '미일안보조약 반대투쟁'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예요. 내용은 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기한이 원래 10년으로 끝나서 기시 노부스케가 다시 갱신을 해야 했는데, 이걸 반대하기 위해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난 투쟁이지요."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라면, 미국과 일본의 약속으로 일본이 그간 저지른 동아시아의 침략사 왜곡과 각국의 배상 문제 등에 있어 일본에 면죄부를 준 조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일본인들에게는 그 조약 자체가 이미 미국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되어 버리니까요. 그러니, 동아시아 왜곡에 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양심적인 사람들도 거리로 나오고, 미국에 졸졸 따라다니는 것에 분노하는 민족주의자들도 나오고. 그때 일본사회가 워낙 혼란상태로 빠지니까 미국에서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가 문제 해결을 위해 왔어요. 해러튼이라는 사람인데, 그때 그 사람이 탄 차가 학생들에게 막히자 헬기가 출동하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결국 그때 데모대가 국회까지 들어가서 기시 노부스케 허벅지를 찌르는 혁명 전야같은 사태가 발생하고, 결국 기시가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 했습니다. 민중들의 저항에 항복한 것이지요."
- 그렇다면 기시 노부스케와 미국과의 관계는 끊어진 것인가요?
"아니지요. 비록 실각은 했지만, 일본 정치란게 그렇지 않거든요. 배후의 파벌이란 게 있으니까.. 1965년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죠?"
- 김종필·오히라 회담이 있었습니다. 치욕적인 한일협정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개중에는 그것 때문에 한국경제가 전후의 아픔을 딛고 일어났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생각하는 사람들 가치관 차이인 것 같고. 중요한 것은 그때 그 중요한 국가적 대사를 치른 일본총리가 바로 사토 에이사쿠라는 점입니다."
- 사토 에이사쿠 라면, 아까 말씀하셨던 전후 관방장관이었던 그 사람과 동일인물입니까?
"네.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이자,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미군정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관방장관 '사토 에이사쿠' 그 사람입니다. 원래는 기시 노부스케가 한일협정을 했어야 하는건데, '안보투쟁'이 일어났단 말이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어요. 그래서 기시는 뒤로 물러났어요. 그렇지만, 사람만 바뀌었을 뿐 사실 똑같은 생각을 가진 이란성 쌍둥이가 총리로 올랐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한일협정이 과연 제대로 된 국교정상화인가, 쉽게 말해서 자주적인 입장에서 한일협정을 체결했냐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과 '캐넌구상'의 연장선상에서 한일협정을 보고 있습니다.
즉 '한일협정'은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1940년대 초중반의 캐넌 구상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결국 일본에 의한 과거 식민지 재지배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 기시 노부스케가 수반으로 있던 만주국의 사관학교를 나온 박정희, 아니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 지금 일본의 우경화 경향은 모두 20세기 초·중반의 역사적 흐름을 잇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지금 한참 논란이 되고 있는 이라크 파병문제를 이야기해 봅시다. 기시가 총리가 된 58년도에 제일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 평화헌법 9조 철폐였습니다. 왜 그러냐면 1945년 당시 미 점령군이 평화헌법 9조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한반도전쟁(6·25)에서 미국이 길 다 닦아 놓고, 일본은 들어가서 지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군대가 굳이 없어도 괜찮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도 한번 진주만 습격 당했었고, 또 다른 연합국의 요구도 있고 하니까 "일본은 군대를 보유할 수 없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면 안된다"는 조항을 집어 넣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한 거였거든요. 그건 서로 합의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상황은 미국과 일본이 생각한 대로 안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 버리니까, 일본만 큰일난 것입니다. 평화헌법 9조에 얽매여 군대를 가질 수 없다는게 문제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 기시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철폐를 주장할 수밖에...
그는 한층 더 나아가 "일본은 핵무장을 해야 한다, 또 치안유지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까지 주장했어요. 치안유지법은 쉽게 말하면 한국의 국가보안법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베껴서 만든 것이니까..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군국주의로 돌아가겠다는 소리입니다. 다만 그 군국주의는 한층 더 세련되었죠. 미국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보면 말입니다."
- 그렇지만, 평화헌법 9조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고이즈미 내각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본다면 좀 근거가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반세기를 이어온 무언가가 있을 듯 합니다만.
"일본 방위청에서 1963년 입안한 '미쓰야(三矢)작전'이라는 군사작전이 있습니다. 기시가 총리 시절 일본 방위청에서 입안한 것인데, 이게 무슨 작전이냐하면 한반도에 제2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의 개입에 관한 군사작전입니다.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 일, 한국이 동시에 북한을 쳐들어간다는 작전입니다. 즉, 미, 일, 한국이 세개의 화살이 되는 것이지요. 이 작전은 7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제 4단계부터 일본이 한반도에 상륙하게 됩니다. 마지막 7단계는 미국이 원폭을 한반도에 투하하는 걸로 되어 있고."
- 그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듯한데요. 구체적인 정보 출처나 근거가 있습니까?
"이쪽에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근거라고 한다면, 일본에서 과거 이 '미쓰야작전' 때문에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40년전 이야기니까 하긴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르겠군요. 1965년 사회당 국회의원들이 이 작전에 관한 정보를 빼내어서 국회청문회를 열었는데, 당시 정부는 이 작전명을 호도하기 위해, 그러니까 일본이 한반도에 상륙하고 미일한 3국 연합군이 북한을 친다는 내용 등을 감추기 위해 당시 사회당 의원들의 질문에 '미쓰야는 쇼와 38년(63년)에 입안한 정책이기 때문에 38(일본식 표기는 미쓰야)이라는 숫자를 따서 미쓰야라고 했을 뿐이다'고 하면서 '절대 미·일·한 3국연합과는 상관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회당 의원들이 진짜 준비를 많이 했지요. '작전 내용을 다 공개해도 괜찮겠느냐'는 식으로 과격하게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정부는 책임을 진다면서 꼬리를 내렸지요. 즉,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고 방위청장관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물러났습니다. 그 때 해임된, 즉 '미쓰야작전'을 설계한 방위청장관이 바로 고이즈미 준야, 즉 지금 고이즈미 총리의 아버지 입니다."
- 소름끼치는 이야기입니다. 기시의 후예라는 것이 지금은 그냥 일상적인 레퍼토리처럼 되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면에는 이런 사실들이 숨어 있었군요.
"한국 사람들은 지금 왜 일본이 우경화되어 가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조건 일본의 우경화를 조심하라 그러는데, 왜 조심해야 되는지에 대해 물어보면 고이즈미가 어쩌구 저쩌구 합니다. 그런데 '고이즈미는 왜 그럴까요'라고 되물어 버리면 할 말이 없어지지요. 그건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고이즈미하고 아베 신조가 뭐라고 하고 있나요? 옛날에 기시가 다 했던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평화헌법 9조 폐기, 그리고 북한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 서서히 핵무장 준비하려고 하고 있지요.
지금 이라크 상황이 종료되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부흥지원 잘 도와주고 돌아왔습니다' 하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돌아갈까요? 아닙니다. 바로 자위대 군대화 추진할 겁니다. 평화헌법 9조 없앱니다. 제 말은 그때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말고 한반도도 미리미리 대처하고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평화적인 한일 공존의 시대는 불가능하다고 보시는 입장입니까?
"허허, 글쎄요. 지금 고이즈미 총리가 실각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미국이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고, 또 국민들의 지지가 뒷받침 되어 주고 있을 뿐더러, 기시의 정신을 이어받은 아베라는 든든한 파트너도 있는데 왜 실각할까요? 그들이 북한을 겨냥해서, 나아가 한반도 전체를 겨냥해서 군대를 만들려고, 핵무장을 하려고 하고 있는데 '평화적 공존' 이라…. 난 절대 불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고이즈미가 있는 한 한일간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끝났다. 약 2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정 선생은 평소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거침없이 토했다. 약속시간을 훨씬 초과했으나 정작 선생의 전문분야인 '남북통일론'에 관해서는 자세한 대화를 나누지 못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사진은 일본 자위대가 행진하는 모습.
1960년대 초반,
일본 자위대(사진)는 미·일 동맹을 구실로 한반도 출병 계획을 수립했다.
한·일 협정의 정면이 양국간 정경 유착이라면, 그 뒷면은 미국을 고리로 한 ‘유사 동맹’ 관계의 성립이었다.
천인공노할 전쟁범죄자의 후손들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
출처 : 서프라이즈에서
조회: 14 날짜: 2005/04/25 20:06
올해로 81세를 맞이한 재일 동포 통일운동가인 정경모 선생의 인터뷰를 읽어봤더니 그 내용을 혼자보기가 너무 아까워서 보다 많은 분들이 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올립니다. 가쯔라-태프트 밀약을 비롯하여 일본 보수의 우경화 및 군국주의의 본질과 미일 동맹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정경모 선생의 탁월한 견해와 해박한 지식을 구체적으로 접하고 나니 정말 섬뜩하군요. 하여튼, 세상 보는 안목을 보다 넓게 해 줄 수 있는 멋진 글입니다.
(본문은 읽기 편하게 약간 조정하여 편집했습니다. 이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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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씨는 "20세기 초부터 지속되어 온 일본과 미국과의 커넥션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면서 "한국사람들은 정보면에서 부족하고, 또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감정만으로 일본을 적대시하는데, 이러면 오래되지 않은 장래에 또 큰일 당한다"며 일본에 경계심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한국의 정보기관조차 파악하고 있을지 의문이라는, 일 방위청 군사작전 '미쓰야(三矢)작전'과 패전 이후 1급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이 가지는 연관성, 60년 '안보투쟁'의 암초를 만나 일시 퇴장한 것 처럼 보였던 일본내 친미 우익의 생명력 등에 대해 선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쏟아냈다.
그러나 선생은 은연중에 한국정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특히 "나라고 왜 고향땅에 안 가보고 싶겠나..."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에서 선생의 짙은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선생께 마지막 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기자는 솔직히 망명객 생활에 대한 한스러움이나 과거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정 선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현대사 공부를 더 많이 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까만색 글씨는 기자의 질문, 파란색 글씨는 정경모 선생의 답변)
-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의 현대사, 특히 6.25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는 필독서로 꼽히기도 합니다만, 직접 번역을 해 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제가 처음 그 책을 접하고 놀란 것은 이 양반이 너무나 정확하게 해방당시 한국사회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총체적 사고라고 할까요? 지금 한국 미국 가릴 것없이 거의 모든 일반인들이 1950년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새벽에 총을 한방 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라구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커밍스의 관점은 그게 아니예요."
-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커밍스는 미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한 1945년 9월 8일부터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이지요. 아까 말한 두 명의 한국인 두 사람이 사살당한 날. <한국전쟁의 기원>은 1945년부터 다루기 시작해 1947년에 끝이 납니다. 미군의 마지막 부대가 철수한 날이 1948년 6월이고, 실제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인데, 이 책은 1947년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후는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가게 돼 있다고 판단한 셈이지요. 말 그대로 '기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 일본은 어떻습니까? 일본정부는 1차 6자회담은 물론 2차에서도 줄곧 북한핵 문제상관없는 자국민 납치문제 상정만을 외치고 있어서 각국으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는데요.
"핀잔 들을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일제가 조선 점령 시절 240만명의 노동자를 강제로 연행을 했어요. 게다가 한국의 윤정옥 교수(전 정대협 대표)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만 10만명 끌어다가 종군위안부로 했다 는 사실입니다. 이걸 중국, 미국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자국민 5명 납치된 '사실'을 자꾸 상정해달라고 하니 짜증나는 거지요. 6자회담이라는 게 원래 미국이 일부러 중국하고 러시아를 끌어 들인건데, 그들만 키워주는 꼴이 되어서 답답해 죽겠는데, 옆에서 일본이 자꾸 북한핵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네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복장이 터지겠습니까? 난 이 사람들이 정말 상식이 있는지 없는지 의문이 갈 때가 있어요. 자기네들이 한 범죄와 잘못은 전혀 뉘우치지도 않은채 자꾸 지네 고집만 피우고 있으니…."
- 그런데 일본은 왜 자꾸 그런식으로 나올까요? 이번에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과 더불어 계속 일본인 납치 문제를 들고 나오는 이유가 역시 자위대의 보통 군대화와 평화헌법 9조의 개정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일본의 우경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사람이 고이즈미 총리이고, 그 고이즈미 내각의 넘버2가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들어봤겠지만, 아베 신조의 조부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인데 이 사람은 1급 전범이예요.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군에 붙들려서 1급전범으로 처형된 사람이 도죠 히데끼를 포함해서 총 7명입니다. 그 처형된 날짜가 1948년 12월 23일입니다. 그런데 도죠나 기시나 다 1급전범이고 기시도 당연히 23일날 처형되었으야 하는건데, 그 다음날인 24일 기시는 무죄 석방이 되었고 나중에 총리까지 했지요."
-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 특히 주모자들은 종전 당시 연합군에 의해 처형 당해 야스쿠니신사에 위패가 봉안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입니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무튼 그때 관방장관이 사토 에이사쿠입니다. 당시 점령군이었던 미군정의 대변인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입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미군은 언젠가는 일본땅을 떠야 합니다. 그런데 소련과 이데올로기 문제로 대립하는 시기가 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신의 방패막을 설정해 놓아야하는데, 그 방패막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일본과 한국이었습니다."
- 정리를 하자면, 당시 미 점령군이 소련과의 대립구조를 생각하여 일본과 한국에 친미파 정권을 세워야겠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시 노부스케는 상당히 이용가치가 많았어요. 그렇다면 자기에게 대든 1급 전범인 기시에게 미국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인데, 그건 기시의 과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범으로, 그리고 전후 경제부흥을 일으킨 총리로서 기시 노부스케를 알고 있지만, 이 사람이 1930년대 만주국의 수반이었다는 사실은 눈여겨 봐야할 대목입니다."
- 만주국이라면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한 일본의 대륙진출 전진기지로 설치된 괴뢰국을 말하는 거죠?
"네. 만주괴뢰국. 그게 생기면서 기시가 그곳을 관리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그곳의 경제발전에 굉장한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만주가 당시에는 소련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시는 소련과 대립하면서 할 거 다 했지요. 그리고 당시 미 점령군의 대변인이었던 사토 에이사쿠의 말도 있고. 이것저것 조사해 보니까 기시가 가장 신뢰감이 간다는 것이지요.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라고 들어봤나요?"
- 20세기 초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가쓰라 타로와 루스벨트 미 통령의 특사였던 태프트 국방장관 사이에서 진행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켜 준 밀약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1905년 7월, 그러니까 포츠머스 조약이 나오기 두 달 전에 한 협잡인데, 내용은 필리핀과 한반도를 바꿔치기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미영일 3국동맹도 들어가지만, 요점은 필리핀은 미국이,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하자는 것 이지요. 그런데 1905년 11월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성립되었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빨리 순식간에 가능했냐면, 그리고 그렇게 당당하게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그러는 게 가능했냐면, 그 뒤에 미국과 맺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일본과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공존공생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지요. 조지 캐넌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습니까?"
- 미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 전문가로 알고 있습니다.
"조지 캐넌 은 1940년대에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최초로 입안한 사람 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100살이 넘었는데, 지금도 살아있지요. 흔히 '캐넌 구상'이라고 불리는 이 내용 중에는 '조선반도의 봉쇄정책' 이라는 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거 아는 사람이 한국 내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미 국방부의 비밀문서를 보고 저한테 알려준 것이니까요. 아무튼 그 내용은 조선반도를 타고 내려오는 소련 세력을 미 정부가 어떻게 하면 막을 수가 있겠는가에 대한 대책인데, 사실 별거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서운 구상이기도 하지요.
왜 무섭냐면, 바로 '가쓰라-태프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주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구식민지였던 곳, 그러니까 한반도와 만주 등을 일본의 재지배에 맡겨야 한반도를 타고 내려오는 소련 세력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캐넌 구상'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걸 트루먼이 받아들였죠. 이런 얘기는 조선이 막 해방되고 난 직후, 그러니까 한국전쟁 전에 나온 얘기들입니다."
- 무섭군요. 정리를 하자면 1945년 이후 미군이 조선에 들어올 때, 이미 저런 구상이 서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래요. 그래서 내가 제일 처음 말한 미 군정의 하지가 지휘한 24군단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2명의 건국준비위원회 사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에 관한 글도 써보고 싶다는 것도 다 이런 맥락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아까 말한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을 봐야 됩니다. 기시가 태평양전쟁 후 전범이 되어서 스가모형무소에 잡혀 있었을 때, OSS(미 CIA의 전신) 요원들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렸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 그렇다면 '1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가 석방된 건 미국의 전략때문이군요.
"정리를 하자면 이런 겁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재탕인 '캐넌 구상'을 트루먼 대통령은 전폭적으로 지지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일본에 의한 '구식민지(만주, 한반도)의 재지배'로 축약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일본에 있는 사람들 중에 소련과 대립하면서 식민지 지배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친미 우익이 누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전후 피폐한 일본의 경제를 살릴 능력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왕이면 자기네들의 대변인인 사토 에이사쿠하고도 연관이 있으면 좋습니다. 그런 조건에 들어맞는 유일무이한 사람이 딱 한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시 노부스케는 옥중에 있을 때부터 자신이 미국의 강력한 지지하에서 총리가 될 것도, 그리고 조선에서 큰 전쟁이 일어날 것도 알고 있었어요. 주위 측근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요. 한반도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러면 조선에 미국이 들어가 점령할 것이고 그러면 그 지배권은 자신들 일본이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 말씀을 듣다 보니,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시작하여 캐넌 구상,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초중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사회 움직임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내가 그런 사실을 옛날부터 계속 말해왔으니까 망명객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친미파나 친일파 세력이 권력을 쥐고 있었던 이승만 정권과 군사독재 정권의 눈엣가시였겠지요. 솔직한 말로 미국하고 일본에 꼼짝 못하는게 우리나라 아닌가요? 그나마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한국의 어느 다방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생각해 봐요. 아마 지금도 정보기관에서 누군가 오지 않을까 싶은데…."
-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물론 부족하긴 하지만요. 공개적으로 친일인명사전도 만드는 시대이고, 또 그런 것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도 좋습니다. 지난 1997년의 정권 교체 이후 한국도 꽤나 민주화가 진전되었거든요.
"하긴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도 되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기시 노부스케가 풀려 나오고 그가 예언한 대로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엔 분단상태로 휴전에 들어가 버렸어요. 미국이 예상한 캐넌 구상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런데 미 정부가 이걸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미소 냉전시대로 돌입하면서 여전히 유의미한 구상으로 남게 되지요. 그리고 기시 노부스케는 1958년 일본수상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 기록에 보면, 기시 노부스케는 1962년에 그만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4년간 총리를 했다는 것인데요.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기엔 너무 짧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실제 미국이 만든 법안인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해야 된다는 말도 계속하는 등 미국과 대립하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만.
"1960년에 한국에 뭐가 있었지요?"
- 1960년이라면, 4·19 혁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4·19 혁명. 당시 일본에도 비슷한게 있었습니다. 일본의 학생·노동 운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안보투쟁'이라는 것인데, 그 때 수십 만명이 모여서 지금 나가타쵸의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했었어요. 60년 6월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 '안보투쟁'이 무엇이냐면 '미일안보조약 반대투쟁'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예요. 내용은 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기한이 원래 10년으로 끝나서 기시 노부스케가 다시 갱신을 해야 했는데, 이걸 반대하기 위해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난 투쟁이지요."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라면, 미국과 일본의 약속으로 일본이 그간 저지른 동아시아의 침략사 왜곡과 각국의 배상 문제 등에 있어 일본에 면죄부를 준 조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일본인들에게는 그 조약 자체가 이미 미국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되어 버리니까요. 그러니, 동아시아 왜곡에 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양심적인 사람들도 거리로 나오고, 미국에 졸졸 따라다니는 것에 분노하는 민족주의자들도 나오고. 그때 일본사회가 워낙 혼란상태로 빠지니까 미국에서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가 문제 해결을 위해 왔어요. 해러튼이라는 사람인데, 그때 그 사람이 탄 차가 학생들에게 막히자 헬기가 출동하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결국 그때 데모대가 국회까지 들어가서 기시 노부스케 허벅지를 찌르는 혁명 전야같은 사태가 발생하고, 결국 기시가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 했습니다. 민중들의 저항에 항복한 것이지요."
- 그렇다면 기시 노부스케와 미국과의 관계는 끊어진 것인가요?
"아니지요. 비록 실각은 했지만, 일본 정치란게 그렇지 않거든요. 배후의 파벌이란 게 있으니까.. 1965년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죠?"
- 김종필·오히라 회담이 있었습니다. 치욕적인 한일협정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개중에는 그것 때문에 한국경제가 전후의 아픔을 딛고 일어났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생각하는 사람들 가치관 차이인 것 같고. 중요한 것은 그때 그 중요한 국가적 대사를 치른 일본총리가 바로 사토 에이사쿠라는 점입니다."
- 사토 에이사쿠 라면, 아까 말씀하셨던 전후 관방장관이었던 그 사람과 동일인물입니까?
"네.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이자,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미군정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관방장관 '사토 에이사쿠' 그 사람입니다. 원래는 기시 노부스케가 한일협정을 했어야 하는건데, '안보투쟁'이 일어났단 말이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어요. 그래서 기시는 뒤로 물러났어요. 그렇지만, 사람만 바뀌었을 뿐 사실 똑같은 생각을 가진 이란성 쌍둥이가 총리로 올랐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한일협정이 과연 제대로 된 국교정상화인가, 쉽게 말해서 자주적인 입장에서 한일협정을 체결했냐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과 '캐넌구상'의 연장선상에서 한일협정을 보고 있습니다.
즉 '한일협정'은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1940년대 초중반의 캐넌 구상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결국 일본에 의한 과거 식민지 재지배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 기시 노부스케가 수반으로 있던 만주국의 사관학교를 나온 박정희, 아니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 지금 일본의 우경화 경향은 모두 20세기 초·중반의 역사적 흐름을 잇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지금 한참 논란이 되고 있는 이라크 파병문제를 이야기해 봅시다. 기시가 총리가 된 58년도에 제일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 평화헌법 9조 철폐였습니다. 왜 그러냐면 1945년 당시 미 점령군이 평화헌법 9조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한반도전쟁(6·25)에서 미국이 길 다 닦아 놓고, 일본은 들어가서 지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군대가 굳이 없어도 괜찮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도 한번 진주만 습격 당했었고, 또 다른 연합국의 요구도 있고 하니까 "일본은 군대를 보유할 수 없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면 안된다"는 조항을 집어 넣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한 거였거든요. 그건 서로 합의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상황은 미국과 일본이 생각한 대로 안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 버리니까, 일본만 큰일난 것입니다. 평화헌법 9조에 얽매여 군대를 가질 수 없다는게 문제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 기시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철폐를 주장할 수밖에...
그는 한층 더 나아가 "일본은 핵무장을 해야 한다, 또 치안유지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까지 주장했어요. 치안유지법은 쉽게 말하면 한국의 국가보안법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베껴서 만든 것이니까..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군국주의로 돌아가겠다는 소리입니다. 다만 그 군국주의는 한층 더 세련되었죠. 미국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보면 말입니다."
- 그렇지만, 평화헌법 9조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고이즈미 내각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본다면 좀 근거가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반세기를 이어온 무언가가 있을 듯 합니다만.
"일본 방위청에서 1963년 입안한 '미쓰야(三矢)작전'이라는 군사작전이 있습니다. 기시가 총리 시절 일본 방위청에서 입안한 것인데, 이게 무슨 작전이냐하면 한반도에 제2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의 개입에 관한 군사작전입니다.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 일, 한국이 동시에 북한을 쳐들어간다는 작전입니다. 즉, 미, 일, 한국이 세개의 화살이 되는 것이지요. 이 작전은 7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제 4단계부터 일본이 한반도에 상륙하게 됩니다. 마지막 7단계는 미국이 원폭을 한반도에 투하하는 걸로 되어 있고."
- 그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듯한데요. 구체적인 정보 출처나 근거가 있습니까?
"이쪽에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근거라고 한다면, 일본에서 과거 이 '미쓰야작전' 때문에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40년전 이야기니까 하긴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르겠군요. 1965년 사회당 국회의원들이 이 작전에 관한 정보를 빼내어서 국회청문회를 열었는데, 당시 정부는 이 작전명을 호도하기 위해, 그러니까 일본이 한반도에 상륙하고 미일한 3국 연합군이 북한을 친다는 내용 등을 감추기 위해 당시 사회당 의원들의 질문에 '미쓰야는 쇼와 38년(63년)에 입안한 정책이기 때문에 38(일본식 표기는 미쓰야)이라는 숫자를 따서 미쓰야라고 했을 뿐이다'고 하면서 '절대 미·일·한 3국연합과는 상관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회당 의원들이 진짜 준비를 많이 했지요. '작전 내용을 다 공개해도 괜찮겠느냐'는 식으로 과격하게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정부는 책임을 진다면서 꼬리를 내렸지요. 즉,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고 방위청장관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물러났습니다. 그 때 해임된, 즉 '미쓰야작전'을 설계한 방위청장관이 바로 고이즈미 준야, 즉 지금 고이즈미 총리의 아버지 입니다."
- 소름끼치는 이야기입니다. 기시의 후예라는 것이 지금은 그냥 일상적인 레퍼토리처럼 되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면에는 이런 사실들이 숨어 있었군요.
"한국 사람들은 지금 왜 일본이 우경화되어 가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조건 일본의 우경화를 조심하라 그러는데, 왜 조심해야 되는지에 대해 물어보면 고이즈미가 어쩌구 저쩌구 합니다. 그런데 '고이즈미는 왜 그럴까요'라고 되물어 버리면 할 말이 없어지지요. 그건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고이즈미하고 아베 신조가 뭐라고 하고 있나요? 옛날에 기시가 다 했던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평화헌법 9조 폐기, 그리고 북한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 서서히 핵무장 준비하려고 하고 있지요.
지금 이라크 상황이 종료되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부흥지원 잘 도와주고 돌아왔습니다' 하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돌아갈까요? 아닙니다. 바로 자위대 군대화 추진할 겁니다. 평화헌법 9조 없앱니다. 제 말은 그때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말고 한반도도 미리미리 대처하고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평화적인 한일 공존의 시대는 불가능하다고 보시는 입장입니까?
"허허, 글쎄요. 지금 고이즈미 총리가 실각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미국이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고, 또 국민들의 지지가 뒷받침 되어 주고 있을 뿐더러, 기시의 정신을 이어받은 아베라는 든든한 파트너도 있는데 왜 실각할까요? 그들이 북한을 겨냥해서, 나아가 한반도 전체를 겨냥해서 군대를 만들려고, 핵무장을 하려고 하고 있는데 '평화적 공존' 이라…. 난 절대 불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고이즈미가 있는 한 한일간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끝났다. 약 2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정 선생은 평소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거침없이 토했다. 약속시간을 훨씬 초과했으나 정작 선생의 전문분야인 '남북통일론'에 관해서는 자세한 대화를 나누지 못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사진은 일본 자위대가 행진하는 모습.
1960년대 초반,
일본 자위대(사진)는 미·일 동맹을 구실로 한반도 출병 계획을 수립했다.
한·일 협정의 정면이 양국간 정경 유착이라면, 그 뒷면은 미국을 고리로 한 ‘유사 동맹’ 관계의 성립이었다.
천인공노할 전쟁범죄자의 후손들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
출처 : 서프라이즈에서
출처 : 한일 공존이 불가능한 이유 (펌)
글쓴이 : 김찬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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